"박완서 작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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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쟁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갔다. 한때 좌익에 동조했던 오빠로 인해 온 가족이 어쩔 수 없이 영웅취급을 받다 서울 수복 후 배신자로 전락했고 갖은 수모를 견뎌야 했다. 1.4 후퇴 때 텅 빈 서울에 부상당한 오빠와 늙은 엄마, 연년생 아기를 둔 올케와 함께 남겨진 마지막 장면에서 박완서는 비로소 작가를 결심한다.
 
그리고 전쟁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갔다. 한때 좌익에 동조했던 오빠로 인해 온 가족이 어쩔 수 없이 영웅취급을 받다 서울 수복 후 배신자로 전락했고 갖은 수모를 견뎌야 했다. 1.4 후퇴 때 텅 빈 서울에 부상당한 오빠와 늙은 엄마, 연년생 아기를 둔 올케와 함께 남겨진 마지막 장면에서 박완서는 비로소 작가를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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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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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사람과의 소통>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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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차산은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도전하고 싶을 만큼 높지도 험하지도 않다. 서울을 둘러싼 기품 있고 웅장한 명산과 비교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는 첫눈에 들었으니 아마 그 산세가 내 나이에 버겁지 않아 보였기 때문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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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걷는 게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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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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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오해>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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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적인 모자를 쓴 여아를 상상하는 건 뱃속이 간지럽도록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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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믿음의 교환>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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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믿음에 대해 쉬 잊고 배신을 오래 기억하며 타인에게 풍기지 못해 하는 것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바탕이 결코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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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대의 비오는 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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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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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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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게는 안 바라요. 그저 보통 사람이면 돼요." 가장 겸손한 척 가장 욕심 없는 척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얼마나 큰 욕심을 부렸었는지 모른다. 욕심 안 부린다는 말처럼 앙큼한 위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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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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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기 없는 물이 아무리 깨끗해도 살아 있는 물이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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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사는 법>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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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족한 것 천지였습니다. 넉넉한 건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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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좋은 점만 보기 시작하면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그 좋은 점이 확대되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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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간 날의 추억 중에서도 사랑받은 기억처럼 오래가고 우리를 살맛 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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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꽃을 선물로 받은 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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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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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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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되 인색하지는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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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인의 허기증>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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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일상의 안일에 깊숙이 함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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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가을이었으면>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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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내가 내 생활의 톱니바퀴와 각박하게 엇물려 놓은 게 어찌 계절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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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2022년 6월 15일 (수) 01:34 판

박완서

박완서(朴婉緖, 1931년 10월 20일 ~ 2011년 1월 22일)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경기도 개풍군 출생이다. 40세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나목〉(裸木)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등단한 이후 꾸준히 소설과 산문을 쓰며 작가로 활동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전쟁의 비극, 중산층의 삶, 여성문제"를 다루었으며, 자신만의 문체와 시각으로 작품을 서술하였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1년 1월 22일에 지병인 담낭암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79세. 소설가 정이현은 추모의 편지에서 "‘한국 문단에 박완서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여성작가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희망이었는지 선생님은 아실까요"라고 적었다.

생애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맹장염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일곱 살 때 서울로 이주했다. 1944년에 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고, 담임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에게 영향을 받았다. 1950년에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 여름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으로 숙부와 오빠를 잃는 등 집안에 비극적인 사건들이 겹치면서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1953년 4월 21일에 직장에서 만난 호영진(扈榮鎭)과 결혼하였고, 두 사람 사이에서 1남 4녀가 태어났다.

40대에 접어든 1970년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나목〉(裸木)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공모전에 당선될 때 그녀는 다섯 아이를 둔 40세의 전업주부였다. 이 소설은 전쟁 중 노모와 어린 조카들의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 초상화부에서 근무할 때 만난 화가 박수근에 대한 내용이다.

천주교인이며 세례명은 정혜 엘리사벳이다. 가족을 잃은 충격에 박완서는 1988년에 서울을 떠나서 부산에 위치한 분도수녀원에서 지내기도 했고, 미국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박완서는 2011년 1월 22일 오전 6시 17분에 지병인 담낭암으로 투병하다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2011년 1월 25일 오후 1시에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경기도 구리시는 ‘박완서 문학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2020년 개관을 목표로 토평도서관 옆 1720m²에 지상 3층 규모로 건립추진예정이다.

체험담(體驗談)

오빠와 남편과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겪은 개인적인 아픔이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그녀의 오빠는 6.25 전쟁 때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돌아와 죽었으며, 이것은 그녀에게 전쟁의 상처이자 문학을 시작한 이유가 되었다. 박완서는 문예지 〈문학의 문학〉과의 대담에서 "6.25가 없었어도 내가 글을 썼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6.25가 안 났으면 선생님이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고, "힘든 시기를 겪고 남다른 경험을 하면서 이걸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언젠가는 이걸 쓰리라"는 생각을 했다고 언급하였다. 남편과 아들이 죽은 후에는 천주교를 믿고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4),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같은 자전적 소설을 통해 삶에 대한 관조를 드러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를 "생활어법의 살아있는 문장으로 그려" 독자들과 소통하였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박완서는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글을 썼다고 고백했으며, 글을 통해서 "자상하고 진실된 인간적인 증언"을 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녀는 "쓰다 보니까 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한두 번씩 우려먹지 않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라고 적어, 1940년대 무렵의 경험이 자신의 소설과 수필에서 활용되었음을 언급하였다.

문학적 성취와 문학관(文學觀)

박완서의 문학적 성취는 "7,80년대 민중민족문학과 모더니즘으로 양분된 문학계에서 간과됐던 중산층의 삶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최원식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는 "중산층의 꿈과 중산층의 속물성까지도 예리하게 파해친 그것이 바로 이 분의 작품세계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소설가 정이현은 박완서에 대해 "인간의 오장육부에 숨겨진 위선(僞善)과 허위의식을 한 치도 숨김없이 태양 아래 까발리고, 공감하게 하고, 그리하여 위로 받게 하던 작가"라고 평했다.

인간 관계

소설가 한말숙과 경성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였으며 두 사람의 숙명여고보 시절 은사는 소설가 박노갑(朴魯甲, 1905년 ~ 1951년, 아호는 도촌(島村))이다.

학력

  • 경성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1951년 한국전쟁으로 2학년 중퇴 후 1984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 학사 학위 수여)

박완서가 작가가 된 이유

박완서의 인생은 교육열이 유난했던 엄마 손에 이끌려 서울 산동네로 옮겨 오면서 일대 전환을 맞이한다. 현저동에서 홀로 삯바느질 하면서도 남매를 길러낸 어머니 밑에서 박완서는 1940년대 서울살이의 고단함과 도시생활의 매력을 동시에 깨달아간다. 소녀가 되면서 친구와 선생님, 오빠의 영향으로 책 읽기에 빠져들었고 서울대 국문과에 합격한다.

작가는 책 읽는 즐거움을 “내 꿈의 세계 창 밖엔 미루나무들이 어린이 열람실의 단층 건물보다 훨씬 크게 자라 여름이면 그 잎이 무수한 은화가 매달린 것처럼 강렬하게 빛났고, 겨울이면 차가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힘찬 가지가 감화력을 지닌 위대한 의지처럼 보였다. 책을 읽는 재미는 어쩌면 책 속에 있지 않고 책 밖에 있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창 밖의 하늘이나 녹음을 보면 줄창 봐온 범상한 그것들하곤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사물의 그러한 낯섦에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라고 기억한다.

그리고 전쟁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갔다. 한때 좌익에 동조했던 오빠로 인해 온 가족이 어쩔 수 없이 영웅취급을 받다 서울 수복 후 배신자로 전락했고 갖은 수모를 견뎌야 했다. 1.4 후퇴 때 텅 빈 서울에 부상당한 오빠와 늙은 엄마, 연년생 아기를 둔 올케와 함께 남겨진 마지막 장면에서 박완서는 비로소 작가를 결심한다.

박완서 명언

  •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中

- 아차산은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도전하고 싶을 만큼 높지도 험하지도 않다. 서울을 둘러싼 기품 있고 웅장한 명산과 비교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는 첫눈에 들었으니 아마 그 산세가 내 나이에 버겁지 않아 보였기 때문일 터이다. - 혼자 걷는 게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 <유쾌한 오해>中

- 환상적인 모자를 쓴 여아를 상상하는 건 뱃속이 간지럽도록 즐거운 일이었다.

  • <수많은 믿음의 교환>中

- 우리가 믿음에 대해 쉬 잊고 배신을 오래 기억하며 타인에게 풍기지 못해 하는 것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바탕이 결코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 <사십 대의 비오는 날>中

-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

  • <보통 사람>中

- "크게는 안 바라요. 그저 보통 사람이면 돼요." 가장 겸손한 척 가장 욕심 없는 척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얼마나 큰 욕심을 부렸었는지 모른다. 욕심 안 부린다는 말처럼 앙큼한 위선은 없다.

  • <꿈>中

- 고기 없는 물이 아무리 깨끗해도 살아 있는 물이 아닌 것처럼

  • <행복하게 사는 법>中

- 부족한 것 천지였습니다. 넉넉한 건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 남의 좋은 점만 보기 시작하면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그 좋은 점이 확대되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 지나간 날의 추억 중에서도 사랑받은 기억처럼 오래가고 우리를 살맛 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 <민들레 꽃을 선물로 받은 날>中

-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있길 바랄 뿐이다.

  •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中

-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되 인색하지는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 <중년 여인의 허기증>中

- 다시 일상의 안일에 깊숙이 함몰할 것인가

  • <그때가 가을이었으면>中

- 그렇다고 내가 내 생활의 톱니바퀴와 각박하게 엇물려 놓은 게 어찌 계절뿐일까.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명대사

  • 감수성과 기억력이 함께 왕성할 때 입력된 것들이 개인의 정신사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듯 결정적이라는 걸 생각할 때, 나의 그런 시기의 문화적 환경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너무고 척박했었다는게 여간 억울하지가 않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밑바닥 가난 속에서도 드물게 사랑과 이성이 조화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이없다고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강경애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P.211)
  • 승리의 시간은 있어도 관용의 시간은 있어선 안 되는게 이데올로기 싸움의 특성인 것 같다.(P.301)
  • 형무소에 인공기라도 꽂혀 있으면 오히려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 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 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따.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P.311~312)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찾을 수 있는 어린시절

박완서는 개성 부근 박적골이라는 시골 양반가에서 자랐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만, 강한 어머니와 의젓한 오빠를 둔 유일한 손녀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과 자식 없는 숙부 네의 사랑까지 독차지하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시절의 기억은 “우리는 그냥 자연의 일부였다. 자연이 한시도 정지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니까 우리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농사꾼이 곡식이나 푸성귀를 씨 뿌리고, 싹트고, 줄기 뻗고, 꽃피고 열매 맺는 동안 제아무리 부지런히 수고해봤자 결코 그것들이 스스로 그렇게 돼가는 부산함을 앞지르지 못한다”는 문장 속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박완서 작가가 제목으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선택한 이유

인터뷰에 따르면, 작가가 이처럼 낯선 식물을 제목으로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작가는 동떨어진 느낌, 통제력을 벗어난 기이한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서울의 첫 번째 집이 있던 그 산꼭대기 동네에서 언덕을 올라 학교에 가면서, 성곽의 외부에서 성곽 내부에 있는 학교로 등교하면서 아이는 인왕산에 있는 풀과 나무와 새들을 살피곤 했다. 시골에서는 초목이 우거졌다. 하지만 서울을 둘러싼 메마른 언덕을 보며 화자는 묻는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싱아가 한 포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싱아가 아주 드믈게 등장한다. 서울 현저동에 이사와 학교에 가면서 아카시아를 먹다가 구역질을 하며 시골마을에 흔히 핀 싱아를 생각해 낸다. 척박한 도시는 시골만큼 풍부하지 않았다. 그 흔하던 잡초도 자라지 않았고, 외래종 아카시아만 인왕상 자락에 자라고 있었다. 생활이 극적으로 반전한 혼란 속에서 도시의 메마름을 반어적으로 생각해 내면서 농촌의 풍요로움을 대변하는 싱아를 끄집어 낸 것 같다.

싱아

작품 속에서 '싱아'가 의미하는 것
  • 싱아는 작품 속에서 서울과 박적골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재이다. '나'의 유년시절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박적골에서 싱아는 아무 데서나 찾아볼 수 있는 들풀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박적골에서의 '그 많던 싱아'를 찾을 수가 없다. 누가 다 먹어버려서 이곳 서울에는 싱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서울에서의 고단한 삶이 박적골에서 누렸던 풍족하고 안온한 삶에서 한 발짝씩 멀어져 가는 과정이라면 '싱아'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삶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싱아란
  • 싱아는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을 위시해 아시아 온대 지역과 스페인과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구주 전역에 분포하며 산록에서 흔히 자란다.
싱아의 생태
  • 높이 1m 내외이고 가지가 많이 갈라지며 털이 없다. 대체로 곧추 자라며 둥글고 단단하다. 잎은 어긋나고 피침형으로 양 끝이 좁고 가장자리에 물결 모양 톱니가 있다. 길이 6센티미터에서 10센티미터, 너비 2.5센티미터에서 5센티미터이다. 꽃은 6월에서 8월에 피고 백색이며 커다란 원추꽃차례에 달린다. 포는 작고 꽃이 각각 2개에서 3개 달린다. 가지 끝이나 잎겨드랑이에 꽃차례가 달리는데 양성화이다. 열매는 수과로 7월에서 8월쯤 여문다.
싱아의 쓰임새
  • 봄에 뜯은 어린 잎과 줄기는 나물로 먹는다. 어린 대는 신맛이 있어 날로 먹는다. 한방에서 수렴제, 폐렴·기침 치료제로 쓰기도 한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