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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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진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3월 3일 (목) 12:14 판 (방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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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와 달동네

성북구의 돈암동 일대와 이웃한 지역에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며 도시민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불량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서울시는 4대문 안에서 화재나 수재로 인해 집을 잃은 사람들을 교외로 밀어냈고 집을 잃은 이재민들은 정부가 준 변두리의 국공유지로 이주했다.

서울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미아리로 계속 유입되어 해마다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고 이재민의 정착촌으로 불리는 달동네는 그렇게 생겨났다

도시빈민의 마지막 보금자리는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달동네는 다세대 벽돌집으로 변화했고, 도시의 성장과 인구의 증가를 감당하기 위한 주택으로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여

30년 동안 지속된 아파트 건설은 특색 없는 도시경관을 만들어 냈다. 현재 성북구에는 장수마을과 북정마을이 남아 근대 서민문화유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북정마을

북정마을은 한양도성 백악구간 조선시대 축조된 서울성곽과 가장 가깝게 형성된 마을이다.

조선시대 때 궁궐에 바치는 메주를 쑤는 일이 이 동네에 주어지면서, 메주를 만들기 위해 온 마을 사람들이 북적북적거렸다~하여 이름을 붙였다는 유래도있다.

북정마을은 19세기 중엽 천주교도박해 때 서울성안의 교인들이 피신하여 숨어 살던 때부터 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성 밖의 맑은 공기와아름다운 경관을 찾아 모여든 한량과 기생들, 이태준, 한용운 등의 가난한 예술가, 그리고 병약한 환자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6·25전쟁을 거치며 북정마을은 도시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되었다.

이후 성북동은 1960~70년대부터 주요 재계인사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고급주택 및 외교사택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남쪽의 부촌과 달리 북쪽의 북정마을은 판자집이 난립한 모습이 대조적이다.

서울한양도성 북악산 성곽은 1968년 폐쇄되어 통제되었다가 2007년 완전히 개방되었다.

지금은 1970~80년대의 풍경을 간직한 마을로 알려져 주변 문화공간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서울시와 성북구는 한옥과 관광을 겸한 지대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한양도성에는 8개의 암문이 있다. 대부분 성곽마을 주민들의 편리를 위해 의해 복원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인왕산 무악동, 창의문과 백악마루 사이, 백악산 곡장아래, 성북동 북정마을, 낙산공원 정상, 낙산 이화동, 낙산 창신동, 장충동 구간 다산동에 8개의 암문이 위치하고 있다.

역사를 품다

19세기 중엽 천주교도박해 때 서울성안의 교인들이 피신하여 숨어 살던 때부터 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성 밖의 맑은 공기와아름다운 경관을 찾아 모여든 한량과 기생들, 이태준, 한용운 등의 가난한 예술가, 그리고 병약한 환자들의 생활 공간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6·25전쟁을 거치며 북정마을은 도시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되었다.

이후 성북동은 1960~70년대부터 주요 재계인사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고급주택 및 외교사택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남쪽의 부촌과 달리 북쪽의 북정마을은 판자집이 난립한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여진다.

1960-70년대에 건축된 500채 정도의 기와집이 현재까지 이어지면서 1960-70년대 서울의 정취를 북정마을에서 느낄 수 있다.

북정마을에는 해마다 지역 특성을 살린 ‘Wall月축제’를 열어 공동체 의식을 함께 나누는 축제를 진행한다.

마을 주변에는 만해 한용운이 말년에 거처한 심우장, 상허 이태준 가옥, 성북동 최순우 가옥도 그대로 남아있다.

한옥

심우장

이태준 가옥

최순우 옛집

축제

월월 축제

관련자료

지역문화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