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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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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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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작가에게] 황석영의‘손님’속 갈등'''
 
'''[작가가 작가에게] 황석영의‘손님’속 갈등'''
 
 
 
   어린 시절, 명절이면 만날 수 있던 고모며 삼촌들은 모두들 거세고 퉁명스런 이북 사투리를 썼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가 버려 이제는 얼굴 모습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지만, 작가 황석영의 ‘손님’을 읽는 동안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씨는 내 아버지 핏줄들의 낯익은 목소리로 되살아나 귓가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곤 했다.<br/><br/>텔레비전 드라마나 코미디에서 가끔 들을 수 있을까, 비록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일지라도 주위에 그런 말씨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던 세대는 아마도 내 또래들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또 다른 얘기겠지만.<br/><br/>‘손님’은 한국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학살의 주도자이기도 했던 형의 유골을 들고 고향을 방문하는 재미교포 목사의 행적을 따라 가면서, 동네 사랑방에서 같이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지내던 이웃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살육과 증오의 진상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 드러냄은 한을 품은 망자들이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서로에게 맺힌 매듭을 푸는, 한반도와 동북 아시아 일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천도굿의 형식이다.<br/><br/>작가가 보는 학살사건의 진상은, 서양에서 온 ‘손님’일 따름인 기독교와 공산주의, 즉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가르치는 종교와 돈이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념, 그 두 믿음을 철저히 신봉하던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갈등이라는 것이다.<br/><br/>기독교나 공산주의나 둘 다 너무나 옳은 말씀들이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이 세상에 전쟁이나 불평등, 증오같은 것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데,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상하게도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갈등과 분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던 적이 많다.<br/><br/>아마도 이원론적인 서양 문명에서 비롯된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 둘다 그 ‘안’에 있는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을 구분하고, 궁극적으로는 ‘밖’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도록 확장해나가는 게 목적인 탓일지도 모른다.<br/><br/>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모든 분쟁은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적대감에 의해 편을 가르는’ 본성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본성의 또 다른 면, 그러니까 긍정적이고 밝은 면은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이다. ‘손님’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보이는 소메 삼촌은 이렇게 말한다.<br/><br/>“사람은 무슨 뜻이 있거나 가까운 데서 잘해얀다구 기랬디. 늘 보넌 식구들과 동니 사람들하구 잘해야 한다구. 길구 제 힘으루 일해서 먹구살디 않으문 덫을 놓아 먹구 살게 되넌데 기거이 젤 큰 죄라구 말이다”<br/><br/>‘덫을 놓아 먹고 산다’니 정말 중심을 꿰뚫는 표현이다. 비단 우리 민족의 문제에 국한되어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지만 모르는 것과 다름없이 뒤로 젖혀놓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일깨워주는 말들이 아닌가. 마침 소설을 읽는 내내 매스컴에서는 8·15 방북단에 대한 보도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 명절이면 만날 수 있던 고모며 삼촌들은 모두들 거세고 퉁명스런 이북 사투리를 썼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가 버려 이제는 얼굴 모습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지만, 작가 황석영의 ‘손님’을 읽는 동안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씨는 내 아버지 핏줄들의 낯익은 목소리로 되살아나 귓가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곤 했다.<br/><br/>텔레비전 드라마나 코미디에서 가끔 들을 수 있을까, 비록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일지라도 주위에 그런 말씨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던 세대는 아마도 내 또래들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또 다른 얘기겠지만.<br/><br/>‘손님’은 한국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학살의 주도자이기도 했던 형의 유골을 들고 고향을 방문하는 재미교포 목사의 행적을 따라 가면서, 동네 사랑방에서 같이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지내던 이웃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살육과 증오의 진상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 드러냄은 한을 품은 망자들이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서로에게 맺힌 매듭을 푸는, 한반도와 동북 아시아 일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천도굿의 형식이다.<br/><br/>작가가 보는 학살사건의 진상은, 서양에서 온 ‘손님’일 따름인 기독교와 공산주의, 즉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가르치는 종교와 돈이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념, 그 두 믿음을 철저히 신봉하던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갈등이라는 것이다.<br/><br/>기독교나 공산주의나 둘 다 너무나 옳은 말씀들이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이 세상에 전쟁이나 불평등, 증오같은 것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데,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상하게도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갈등과 분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던 적이 많다.<br/><br/>아마도 이원론적인 서양 문명에서 비롯된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 둘다 그 ‘안’에 있는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을 구분하고, 궁극적으로는 ‘밖’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도록 확장해나가는 게 목적인 탓일지도 모른다.<br/><br/>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모든 분쟁은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적대감에 의해 편을 가르는’ 본성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본성의 또 다른 면, 그러니까 긍정적이고 밝은 면은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이다. ‘손님’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보이는 소메 삼촌은 이렇게 말한다.<br/><br/>“사람은 무슨 뜻이 있거나 가까운 데서 잘해얀다구 기랬디. 늘 보넌 식구들과 동니 사람들하구 잘해야 한다구. 길구 제 힘으루 일해서 먹구살디 않으문 덫을 놓아 먹구 살게 되넌데 기거이 젤 큰 죄라구 말이다”<br/><br/>‘덫을 놓아 먹고 산다’니 정말 중심을 꿰뚫는 표현이다. 비단 우리 민족의 문제에 국한되어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지만 모르는 것과 다름없이 뒤로 젖혀놓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일깨워주는 말들이 아닌가. 마침 소설을 읽는 내내 매스컴에서는 8·15 방북단에 대한 보도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소설가, 부희령<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108271951091 경향신문-작가가 작가에게]</ref>
 
─소설가, 부희령<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108271951091 경향신문-작가가 작가에게]</ref>
  

2020년 6월 27일 (토) 23:49 판



작품 소개

줄거리

작가의 말

『손님』은 내가 베를린에 체류하던 시절에 사실상 세계적인 냉전체제 해체의 시작이었던 장벽붕괴를 목격하면서 진작부터 구상했던 작품이다. 문체나 구성에 대해서 이른바 '객관성'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돌이켜보며 반성하던 무렵이었다. 당시의 내 창작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은 보다 과감하게 보다 풍부하게 해체하여 재구성해야 된다. 삶은 놓친 시간과 그 흔적들의 축적이며 그것이 역사에 끼어들이기도 하고 꿈처럼 일상 속에 흘러가버리기도 하는 것 같다. 역사와 개인의 꿈같은 일상이 함께 현실 속에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서도 안되고, 화자는 어느 누군가의 관점이나 일인칭 삼인칭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시점에 따라 서로를 교차하여 그려서 완성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한 인물과 사건을 두고도 모든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시각의 다양성으로 자수를 놓듯이 그릴 수는 없을까. 객관적인 서술방법도 삶을 그럴싸하게 그린다고 할 뿐이지 삶을 현실의 상태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다. 삶이 산문에 의하여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의 흐름에 가깝게 산문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나의 형식에 관한 고민이다.


나는 거기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가본 적도 없지만 아버지가 소년기에 만주로 떠나기 전에 살았던 황해도 신천(信川)을 방문한 적이 있다. 89년의 방북시기에 그곳을 안내 받아 갔었다. 물론 외가인 평양과는 달리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났던 아버지의 친척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호적상 나의 원적은, 黃海道 信川郡 溫川面 溫井里 103番地이다. 신천에는 미군의 양민학살을 고발하는 '미제 학살기념 박물관'이 있었고 나는 당연히 그곳으로 안내되었다. 그러나 '또다른 진상'이 있지 않을까 하며 의심하는 버릇은 작가로서의 천성이기도 했다. 나중에 뉴욕에 체류하면서 류아무개 목사를 만나 그의 소년시절의 목격담을 듣고서야 의문이 풀려갔다. 그뿐만 아니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신 친구의 모친에게서 우연히 전쟁 당시의 황해도 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자료와 목격담을 모아나가다가 귀국해서 투옥되면서 작업을 중단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훨씬 다행이었다. 옥방에서 나의 구상이 좀더 무르익을 때까지 이러저러한 형식들을 적용해볼 수 있었다. 이 작품에 그려진 사실들은 '우리 내부에서 저질러진 일'이었으므로 북이나 남의 어떤 부류들이 매우 싫어할 내용일지도 모른다.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라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계급적 유산이 남도에 비해 희박했던 북선 지방은 이 두 가지 관념을 '개화'로 열렬하게 받아들였던 셈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뿌리를 가진 두 개의 가지였다. 천연두를 서병(西病)으로 파악하고 이를 막아내고자 했던 중세의 조선 민중들이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으로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했다. 한국전쟁 50주년이던 작년 6월부터 『손님』의 집필이 시작되었다. 또한 작년은 남북정상회담이며 이산가족 상봉 등의 사건으로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변화가 시작되기도 했다. 서구에서 냉전이 사라진 지 십여년이 지나서야 겨우 변방의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사실상 무서운 '손님 마마님'은 아직도 미국이 아닌가. 이 작품은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씌어졌다. 여기서는 굿판에서처럼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등장하고 그들의 회상과 이야기도 제각각이다. 나는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라는 하나의 씨줄과, 등장인물 각자의 서로 다른 삶의 입장과 체험을 통하여 하나의 사건을 모자이끄처럼 총체화하는 '구전담화'라는 날줄을 서로 엮어서 한폭의 베를 짜듯 구성하였다. 지노귀굿은 망자(亡者)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전국적인 형식의 '넋굿'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진오귀, 오구, 지노귀 등으로 불린다.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과 냉전의 유령들을 이 한판 굿으로 잠재우고 화해와 상생의 새세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작자의 본뜻이기도 하다.


─2001년 5월 황석영[1]


작품 해설

[작가가 작가에게] 황석영의‘손님’속 갈등

 어린 시절, 명절이면 만날 수 있던 고모며 삼촌들은 모두들 거세고 퉁명스런 이북 사투리를 썼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가 버려 이제는 얼굴 모습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지만, 작가 황석영의 ‘손님’을 읽는 동안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씨는 내 아버지 핏줄들의 낯익은 목소리로 되살아나 귓가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곤 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코미디에서 가끔 들을 수 있을까, 비록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일지라도 주위에 그런 말씨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던 세대는 아마도 내 또래들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또 다른 얘기겠지만.

‘손님’은 한국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학살의 주도자이기도 했던 형의 유골을 들고 고향을 방문하는 재미교포 목사의 행적을 따라 가면서, 동네 사랑방에서 같이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지내던 이웃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살육과 증오의 진상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 드러냄은 한을 품은 망자들이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서로에게 맺힌 매듭을 푸는, 한반도와 동북 아시아 일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천도굿의 형식이다.

작가가 보는 학살사건의 진상은, 서양에서 온 ‘손님’일 따름인 기독교와 공산주의, 즉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가르치는 종교와 돈이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념, 그 두 믿음을 철저히 신봉하던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갈등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나 공산주의나 둘 다 너무나 옳은 말씀들이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이 세상에 전쟁이나 불평등, 증오같은 것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데,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상하게도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갈등과 분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던 적이 많다.

아마도 이원론적인 서양 문명에서 비롯된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 둘다 그 ‘안’에 있는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을 구분하고, 궁극적으로는 ‘밖’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도록 확장해나가는 게 목적인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모든 분쟁은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적대감에 의해 편을 가르는’ 본성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본성의 또 다른 면, 그러니까 긍정적이고 밝은 면은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이다. ‘손님’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보이는 소메 삼촌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무슨 뜻이 있거나 가까운 데서 잘해얀다구 기랬디. 늘 보넌 식구들과 동니 사람들하구 잘해야 한다구. 길구 제 힘으루 일해서 먹구살디 않으문 덫을 놓아 먹구 살게 되넌데 기거이 젤 큰 죄라구 말이다”

‘덫을 놓아 먹고 산다’니 정말 중심을 꿰뚫는 표현이다. 비단 우리 민족의 문제에 국한되어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지만 모르는 것과 다름없이 뒤로 젖혀놓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일깨워주는 말들이 아닌가. 마침 소설을 읽는 내내 매스컴에서는 8·15 방북단에 대한 보도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소설가, 부희령[2]

작품 연구

수상

  • 2001년 제9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작품 평가

작품 배경

RDF 및 온톨로지

RDF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자료

출처

  1. 황석영. 2001. 손님. 경기:파주
  2. 경향신문-작가가 작가에게


작성자 및 기여자

인문정보콘텐츠(2020) 강의의 일환으로 송지선(1611138)이 2020년 6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