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 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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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1월 28일 (수) 17:22 판 (신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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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오늘날 체코 공화국의 기원인 모라비아의 이반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모라비아에서 장식용 회화, 주로 연극 풍경을 그리는 일을 한 후 1879년 비엔나로 건너가 비엔나 연극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예술 교육을 받았다. 1881년에 회사 건물이 불타 직장을 잃은 뒤에는 모라비아로 돌아와 데코레이션, 초상화를 그리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Mikulov의 Karl Khuen 백작이 무하에게 Hrusovany Emmahof Castle의 벽화 장식을 맡겼는데, 이후 무하의 예술 학업을 지원해줄 정도로 그에게 감명을 받았다.

무하는 1887년에 파리로 이사해 Académie Julian과 Académie Colarossi에서 순수 미술 공부를 계속하면서 잡지와 광고 삽화 일을 맡아 했다. 1894년 크리스마스 무렵, 인쇄소에서 우연히 파리의 가장 유명한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출연하는 영화의 새로운 포스터 작업을 하게 되었다. 무하는 2주 내에 석판화 작업을 하겠다고 자원했고 1895년 1월, 그가 포스터를 제작한 연극 '지스몽다(Gismonda)' 광고가 파리 거리에 나타났다. 그 포스터는 하룻밤 사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새로운 예술 스타일과 그 스타일의 창조자를 파리 시민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베르나르는 무하와의 6년 계약에서의 첫 포스터 성공에 매우 만족해했다.

이후 무하는 다양한 그림, 포스터, 광고를 그려냈고 삽화, 보석, 벽지, 극장 세트 등의 디자인도 맡았는데 이러한 그림들은 초기에 '무하 스타일'로 불렸지만 후엔 프랑스어로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아르누보'로 불리게 되었다. 기존의 포스터 작가들과 달리 파스텔 색상을 사용하며 신고전주의적 예복을 걸치고 꽃에 둘러싸여 머리 뒤에서 후광을 내뿜는 여성을 자주 묘사하였다. 1900년 파리 국제 전시회에서 '무하 스타일'이 국제적으로 퍼져나갔고 무하는 "박람회가 예술과 공예에 미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무하의 아르누보 스타일은 자주 모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하가 그의 일생 동안 거리를 두려고 했던 스타일이었다. 그는 세련된 양식을 따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그의 그림은 순수하게 체코 예술과 체코 예술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은 오직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그 이상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가 상업 예술을 통해 얻은 명성에 대한 좌절감을 느꼈으며 고귀한 예술과 그의 출생지를 고귀하게하는 더 높은 프로젝트에 항상 집중하기를 원했다.

그 때문에 무하는 1906년 6월 10일 프라하에서 Maruska (Marie / Maria) Chytilová와 결혼했다. 부부는 딸인 야로슬라바가 뉴욕에서 태어났을 때,1906 년부터 1910 년까지 미국에서 머물렀다. 그들은 1915년 3월 12일 프라하에서 아들 지리를 낳았다. (그 아들은 이후 유명한 기자, 작가, 시나리오 작가, 자서전 소설 작가 겸 무하 작품 연구자가 된다.) 프라하에서 그는 자신의 민족주의적 프로젝트에 투자할 자금을 모을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백만장자 찰스 크레인 (Charles R. Crane)의 지원을 받아 혁명을 촉진하고, 슬라브 민족주의의 토마스 마사 리크 (Thomas Masaryk)를 만난 후 도움을 받았다. 가족은 체코의 땅으로 돌아와 프라하에 정착하여 무하는 극장의 미술관을 장식했고, 시장 사무실의 벽화와 도시의 다른 랜드 마크들에 그의 작품으로 공헌했고 체코 슬로바키아가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했을 때, 무하는 새로운 우표, 지폐 및 기타 정부 문서를 새 주에 맞게 디자인했다.

작품과 작품 특성

파리의 보헤미안

프랑스 기존 체제에서 외국인, 아웃사이더였던 '보헤미안'으로서의 무하의 초기 작품들이다. 이방인 예술가였던 무하가 사라 베르나르의 '지스몽다' 포스터로 그의 예술 인생에 어떤 전환점을 가져왔는지 알 수 있다.


무하는 '지스몽다'포스터 제작 이후 파리에서 스타덤에 올라 각종 광고, 포스터, 패키지 디자인 등을 맡게 된다.

무하 스타일

신비주의자

애국자

파리와 미국에서의 성공 이후, 1910년 무하는 그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30여 년 전 고향을 떠난 이후 무하는 줄곧 조국과 그의 민족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는 방향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특히 무하는 그의 야망이 담긴 20점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질 <슬라브 서사시(The Slav Epic)> 작품의 제작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묘사한 작품을 통해 무하는 모든 슬라브 동포의 정신적인 통합을 원했고 그들과 함께 정진하여 모든 슬라브 국가의 공통된 목표인 정치적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무하의 애국심과 민족 자긍심이 나타난 작품으로는 그가 조국을 위해 제작한 두 가지의 기념비적 작품, 프라하 시청사의 시장실에 그린 벽화와 <슬라브 서사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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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슬라브 서사시>를 그리는 무하의 모습이다.

예술적 철학가

영향

참고문헌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