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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國歌)의 필요성'''
 
#'''국가(國歌)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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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조선은 세계 강국들과의 문호를 개방하면서 개화를 시작한다. 이에 더하여 일제의 조선 침략 의지가 점차 심해지자 전국 곳곳에서는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애국애족 움직임이 활발해지게 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애국애족의 마음을 담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도 표출되었다. 또한 1882년,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 때 당시 조선은 국가(國歌)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양국의 국가가 아닌 미국의 민요가 조약식에서 흐르게 되었다.
 
19세기 말, 조선은 세계 강국들과의 문호를 개방하면서 개화를 시작한다. 이에 더하여 일제의 조선 침략 의지가 점차 심해지자 전국 곳곳에서는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애국애족 움직임이 활발해지게 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애국애족의 마음을 담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도 표출되었다. 또한 1882년,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 때 당시 조선은 국가(國歌)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양국의 국가가 아닌 미국의 민요가 조약식에서 흐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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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국가(國歌) 탄생'''
 
#'''최초의 국가(國歌)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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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대한제국 서양식 군악대의 지휘자 겸 국가(國歌) 작곡가로 초빙된 사람이 독일 제국의 해군 군악대 군무원(작곡가) 출신인 프란츠 에케르트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국악(전통 음악)을 최대한 살려서 국가(國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실제 결과물도 그러한 노력이 반영되었다.

2018년 11월 29일 (목) 07:04 판


애국가

대한민국의 국가(國歌)

초기의 애국가(구애국가)

  1. 국가(國歌)의 필요성
애국창가 악보집에 실린 전국 곳곳의 초기 애국가 중 하나이다.

19세기 말, 조선은 세계 강국들과의 문호를 개방하면서 개화를 시작한다. 이에 더하여 일제의 조선 침략 의지가 점차 심해지자 전국 곳곳에서는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애국애족 움직임이 활발해지게 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애국애족의 마음을 담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도 표출되었다. 또한 1882년,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 때 당시 조선은 국가(國歌)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양국의 국가가 아닌 미국의 민요가 조약식에서 흐르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당시 왕이었던 고종은 국가의 권위를 위하여 국가(國歌)의 필요성을 깨달았고 대한제국의 국가(國歌)를 만들 것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정에는 서양의 음악을 배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국가(國歌)를 작곡하고 서양식 군악대를 지휘할 서양 음악가를 거액에 영입하게 되었다.

  1. 최초의 국가(國歌) 탄생
프란츠 에케르트

그리하여 대한제국 서양식 군악대의 지휘자 겸 국가(國歌) 작곡가로 초빙된 사람이 독일 제국의 해군 군악대 군무원(작곡가) 출신인 프란츠 에케르트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국악(전통 음악)을 최대한 살려서 국가(國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실제 결과물도 그러한 노력이 반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