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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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윤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16일 (일) 16:1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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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900년대 초반 대중의 지식 수준 향상과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며, 일제 민족말살정책에 대해 민족을 지키고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을 건학이념으로 1907년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이다. 국권회복이라는 설립 취지였기에, 일제의 감시와 수난의 대상이기도 했다. 오산학교는 교육구국운동의 지표 중 하나이고, 국권회복이 이뤄질 때까지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건재했으며, 다양한 교육 경험을 제공했고 민족 정신을 양육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는 학교이다.

설립 초기 운영 방식(1907~1910)

과목은 수신, 역사, 지리, 수학, 물리, 법학통론, 헌법대의, 체조다 있었다. 수업 수준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사이였고, 민족 정신 양성이 건학 이념이자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역사 과목을 가장 중시했다. 전국 각지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많았으며, 학교의 재정적 어려움이 심해 이승훈이 자신의 토지를 전부 팔아 학교의 재산에 기부했다.

기독교 교육 강조기(1910~1919)

1910년 12월 교내에 교회를 설립하면서 교직원과 학생들이 남강의 뒤를 이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성경이 교과목 내에 개설되었고 남강이 조회시간마다 줄곧 설교와 기도를 하고는 했다. 교육정신으로 기독교 사상이 강조되었다. 단순히 기독교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와 기독교정신이 동등하게 중시되던 시기였다.

3.1 운동 이후 변화(1919~1934)

3.1 운동 이후 일제의 보복이 먼저 향한 곳은 민족 독립 운동의 진원지인 오산학교였고, 3월 31일 일제 헌병들이 학교와 교회에 방화를 하였다. 교장 조만식은 구금되고, 몇몇 교사들은 경찰에게 구속되었다. 화재와 재정 부족으로 폐교의 위험에 처하자 김기홍과 졸업생, 사회유지의 협력으로 기부금이 모여 재건이 성공하게 된다.

1934년 대화재 이후(1934~1942)

1934년 화재로 본관이 완전히 소진되었으나 모금 운동을 통해 화재 후 2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1941년에는 모든 건물과 시설 등이 최신식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참여인물

여준, 윤기섭, 유영모, 장지영, 이광수, 염상섭, 김억 등이 교사로 참여했다.

역사

년도 내용
1907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개교.
1910년 교내에 교회 설립
1919년 독립운동의 본거지라 불리며 소각당함.
1923년 이승훈 출옥후 재건.
1934년 대화재로 본관 소진.
1934년 본관 재건축.
1942년 일본인 교장으로 교체.
1950년 부산으로 교사 옮김.
1956년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전


오산학교


RDF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오산학교 이광수 A에서 B가 일했었다.
오산학교 이승훈 A를 B가 설립했다.
오산학교 김소월 A를 B가 졸업했다.
오산학교 기독교사상 A가 B를 강조했다.
오산학교 일제 A가 B에게 압박당했다.

참고문헌

'오산학교의 교육이념과 실천 연구-정주시대의 남강, 교직원, 학생들의 활동에 대한 분석-'/ 이경림 /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