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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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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 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만주로 떠났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미행을 하여,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만주에서 같은 길을 걷는 김태식, 한일진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다짐하였다.
 
1930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 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만주로 떠났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미행을 하여,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만주에서 같은 길을 걷는 김태식, 한일진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다짐하였다.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를 향해 갔다. 그는 혼자 랴오둥 반도의 남단에 있는 다롄[大連]을 거쳐 산둥[山東]반도에 있는 칭다오[靑島]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독립운동 할 곳을 물색하기도 하였다. 결국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는 프랑스 조계(租界 프랑스가 조차한 지역) 안에 있는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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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를 향했다.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를 찾아가 그의 뜻을 말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그는 중국에서의 뜻있는 일을 위해 생활을 구상하였다. 우선 경제생활을 위해 한국인인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하였다. 한편으로는 국제활동을 위해 상하이 영어학교에서 영어 공부도 병행하였다. 그리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金九)를 찾아가 그의 뜻을 말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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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하였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의 도움을 받아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하였다.  
  
훙커우공원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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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를 감추고 식장에 입장해 거사를 치렀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은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의 지휘하에 전쟁을 승리하였다. 일본군은 일본 국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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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1월 20일 그는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하였다.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金弘一)의 도움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폭탄(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였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는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重光癸] 등이 중상을 입었다.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2. 11. 20). 그리고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다.
 
  
 
==수상내역 ==
 
==수상내역 ==

2018년 6월 13일 (수) 23:12 판


윤봉길 (1908~1932)

생애 및 활동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에서 출생. 본관은 파평, 호는 매헌이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하였다.

동생인 윤성의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계속하였다.

1926년에는 농촌사회운동을 펼쳤다. 농민계몽을 위해 《농민독본》이란 교재를 집필하여 야학회를 조직,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29년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이란 단체를 설립하여 농촌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해 2월 18일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를 열고, 촌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농촌에서 문화활동이 많지 않던 당시여서 관람객이 매우 많이 모여 성공리에 마쳤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농촌활동을 계속하였고, ‘월진회'라는 농민단체를 만들어 회장에 추대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농촌자활운동을 펴나갔다.

1930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 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만주로 떠났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미행을 하여,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만주에서 같은 길을 걷는 김태식, 한일진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다짐하였다.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를 향했다.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를 찾아가 그의 뜻을 말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하였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의 도움을 받아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를 감추고 식장에 입장해 거사를 치렀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은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32년 11월 20일 그는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수상내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상.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윤봉길 독립운동가 윤봉길독립운동가이다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