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생애)
(임진왜란)
57번째 줄: 57번째 줄:
 
===임진왜란===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에 왜군 함대 700척이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선봉군의 병력은 약 16만명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의 침략이 알려진 때는 원균(元均)의 파발이 도착한 이틀 뒤였다. 이순신은 그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아울러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냈다. 그 뒤 이순신은 휘하의 병력 700여명을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수군은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도록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의 함선은 이미 전라좌도 앞바다에 도달하고 있었다. 다음날 4월 30일에 이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에 왜군 함대 700척이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선봉군의 병력은 약 16만명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의 침략이 알려진 때는 원균(元均)의 파발이 도착한 이틀 뒤였다. 이순신은 그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아울러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냈다. 그 뒤 이순신은 휘하의 병력 700여명을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수군은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도록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의 함선은 이미 전라좌도 앞바다에 도달하고 있었다. 다음날 4월 30일에 이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
 +
5월 4일 새벽, 최초의 출격으로 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등 도합 85척의 선단이 7일 옥포 앞바다를 지나다 도도타카토라가 이끄는 적선26척을 만나 전멸시켜 임진왜란 첫 승리를 해냈다.
 +
 +
5월 4일 최초의 출격 작전(일명 1차 출전)으로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전멸시켜 임진왜란 최초로 승리를 거뒀다.[82] 옥포 해전은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 Search & Destroy. 즉, 수색 섬멸전은 이순신이 임진년 당시 사용했던 기본 전략이었다. 이 전투에서의 조선 수군 피해는 부상자 3명.[83] 옥포 이후 적진포와 합포에서 각각 5척과 15척을 추가로 격침하고 여수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선조는 이 싸움의 공으로 공을 가선대부로 봉한다.
 +
 +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
 +
옥포해전은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게 된 해전이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에 침략했던 왜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17일(음력 5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27일(음력 5월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반도의 대부분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임진왜란==

2019년 12월 2일 (월) 00:03 판

이순신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영웅 충무공 이순신 (1545- 1598)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계속된 왜군과의 싸움에서 전투에서 패배를 하지않고 전승을 하며 나라를 구하게 된다.
당시 학익진과 같은 다양한 전술로 싸우며 군지휘에 특출난 기량을 보이고 왜란 중에 쓴 난중일기는 현재 국보와 유네스코에 등재되있을 만큼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중요한 기록을 남긴다.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워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지만 주변의 모함과 시기로 정유년에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후에 원균이 죽자 복직하여 싸워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1598년 12월 16일 도요토미가 죽고 철수하는 왜군과 노량에서 큰 전투를 벌여 승리를 하지만 여기서 이순신은 왜군이 쏜 탄환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생애

유년기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인종 1년에 한성부 건천동에서 4형제 중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고려 시대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관의 양반 가문으로,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다.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며, 그의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변수림(卞守琳)의 딸이다.


이순신의 가문은 증조부인 이거(李琚)는 병조참의에 이르렀지만, 할아버지인 평시성 봉사직을 맡은 이백록(李百祿)이 조광조(趙光祖)와 가까이 지내다 조광조의 기묘사화로 인해 화를 당한 뒤로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가세가 많이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어릴 적 이순신은 본가가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였으나, 어린 시절 대부분을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랐다. 이순신은 어릴 적 부터 용감하고 활을 잘쏘며 말타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당시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후에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묘사를 하며 어릴 적부터 성품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관직의 시작

22세가 되던 해에 늦은 나이로 무예를 시작하여 28세에 무과 별시에 응시하여 시험을 보던 중 말에서 떨어지면서 왼발을 다쳐 실격하게 된다. 후에 무예를 계속 닦으며 32세에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 직으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하면서 무관으로서 시작을 하였다. 이어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역임하고, 1586년(선조 19년)에는 사복시 주부(종 6품)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년)에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당시 북병사 이일에게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추도에 살고있던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전투를 하였지만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녹둔도 전투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열다섯 필의 말이 약탈 당하였다. 이 패전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에게 그 책임을 덮어 씌우고 이순신은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첫 번째 백의종군

이순신은 일생에 총 두번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게된다. 첫 번째 백의종군은 북병사 이일이 조정에 이경록과 함께 녹둔도 전투에 참가한 이순신을 군율로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하지만 조정에는 당시에 녹둔도 전투에 대한 대략적인 전말이 전해져 있어 선조는 한번의 실수로 사형은 과하다며, 북병사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백의종군 석 달만에 이순신은 북병사 이일의 휘하에서 종군하며 1588년 1월에 신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여진족 토벌에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받아 사면되어 복직되었다.

임진왜란 전

백의종군에서 복직하여 1589년 유성룡의 천거로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에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1591년 47세가 되던 해에 정3품 당상인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는 당시에도 매우 속도의 승진인데 이것은 당시 왜군과의 전쟁이 임박하여 유능하고 실전 경험이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선조의 특례였다. 이것을 통해 당시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이미 유망한 장수로 인식하고 있는것을 보여준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이순신은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을 주기지로 삼아 판옥선과 거북선 등 함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을 확보하며 왜침에 대비하여 군사훈련들을 지속적으로 실시하며 수군을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에 왜군 함대 700척이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선봉군의 병력은 약 16만명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의 침략이 알려진 때는 원균(元均)의 파발이 도착한 이틀 뒤였다. 이순신은 그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아울러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냈다. 그 뒤 이순신은 휘하의 병력 700여명을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수군은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도록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의 함선은 이미 전라좌도 앞바다에 도달하고 있었다. 다음날 4월 30일에 이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5월 4일 새벽, 최초의 출격으로 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등 도합 85척의 선단이 7일 옥포 앞바다를 지나다 도도타카토라가 이끄는 적선26척을 만나 전멸시켜 임진왜란 첫 승리를 해냈다.

5월 4일 최초의 출격 작전(일명 1차 출전)으로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전멸시켜 임진왜란 최초로 승리를 거뒀다.[82] 옥포 해전은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 Search & Destroy. 즉, 수색 섬멸전은 이순신이 임진년 당시 사용했던 기본 전략이었다. 이 전투에서의 조선 수군 피해는 부상자 3명.[83] 옥포 이후 적진포와 합포에서 각각 5척과 15척을 추가로 격침하고 여수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선조는 이 싸움의 공으로 공을 가선대부로 봉한다.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옥포해전은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게 된 해전이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에 침략했던 왜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17일(음력 5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27일(음력 5월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반도의 대부분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옥포해전

한산도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난중일기

관련자료

거북선

이순신광장

참고 및 출처

라이센스(CC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