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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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철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19일 (화) 15:30 판 (사건의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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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항쟁

개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하고 참혹한 학살 사건 중 하나로,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다.

일본제국의 패망이후 남북한의 이념갈등 발단이 되어 봉기한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간의 충돌 과정과, 이승만 정권 이후 미국 정부의 묵인 하에 벌어진 초토화 작전 및 무장대의 학살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다.

확인 사망자는 10,715명, 추정 사망자는 6만 ~ 8만명이다.


사건의 발단

배경

제주 4.3 항쟁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의 부족, 전염병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1947년 3월 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려 2만 5천~3만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이 날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기백 명 정도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도중 사건이 하나 터졌다. 오후 2시 45분 경, 기마경관 소속의 임영관(任永官) 경위가 시위를 막기위해 군중들을 헤치다가 제북교에서 관덕정으로 들어서는 길 모퉁이를 돌려 할 때 고빗길에서 서성대던 어린이를 타던 말의 말굽에 아이가 채었는데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었고 기마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 군중들은 도망가는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팔매질과 더불어 거리가 난장판이 되기 시작하자 그러자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응원경찰들로 하여금 관덕정 주변의 사람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 일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3월 1일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이 제주도에 선포되었고, 다시 수백명의 응원경찰이 육지로부터 파견됐다. 더불어 3월 1일의 시위와 관련하여 여러 명이 경찰에 끌려가자 제주도의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사건의 시작

제주 4.3 항쟁의 발단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조선로동당 등 350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동시에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양측의 대립은 급속도록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이 제주 4.3사건은 한국 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학살은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그후 1954년 9월 21일까지 계속되었다.

경과

6월 중순경 남조선로동당 제주도지부의 김달삼 등은 제 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벗어났고, 대한민국 단독 정부는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제주도 빨치산으로 홍보했다. 이후 잠시 소강 상태에 놓였으나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하였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宋堯讚)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그리고 대대적인 강경 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된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 버린, 이른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이 강경 진압작전은 결국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 마을 주민 2만여 명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

결말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비극은 또다시 일어난다. 한국전쟁 내내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 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학살됐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어(S) 목적어(O) A는 B를 ~하다(P)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