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사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고택의 건립과역사[편집] 고택의 설립[편집] 이 고택(古宅)은 대한제국(大韓帝國 : 1897년~1910년) 시기의 관료로서 광업·금융업·창고업 등...)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19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고택의 건립과역사[편집]
+
<onlyinclude>
 +
{|class="metadata" style="background:#f2f2f2; width:320px; margin: 5px 5px 5px 5px;" cellspacing="10" align="right"
 +
|-
 +
! colspan="2" style="background:#3ca9a9; color:#ffffff; font-size:130%; text-align:center;" | '''최사영'''
 +
|-
 +
| colspan="2" style="text-align:center;" | [[파일:사람.png|200px]]
 +
|-
 +
| style="width:80px; text-align:center;" |'''이름''' || [[최사영]]
 +
|-
 +
| style="text-align:center;"|'''한자''' || 崔思永
 +
|-
 +
| style="text-align:center;"|'''생몰년''' || 18??~192?
 +
|-
 +
| style="text-align:center;"|'''거주지''' || [[삼개]]
 +
|-
 +
| style="text-align:center;"|'''직업''' || [[지역유지]]/[[신사]], [[사업가]]
 +
|-
 +
| style="text-align:center;"|'''활동분야''' || [[애국계몽단체]]/소학교의 경제적후원, [[독립운동가]]/수해지역민 후원
 +
|-
 +
| style="text-align:center;"|'''관련단체''' || [[기호흥학회]], [[보성 소학교]]  
 +
|-
 +
|}
 +
</onlyinclude>
  
고택의 설립[편집]
 
  
이 고택(古宅)은 대한제국(大韓帝國 : 1897년~1910년) 시기의 관료로서 광업·금융업·창고업 등에 종사하며 부를 축적해 재력가로도 널리 알려진 최사영(崔思永)이 1906년 마포(麻浦)에 건립한 집의 안채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
'''최사영(18??~192?)'''
 +
==생애==
  
고택의 변화[편집]
+
최사영 인물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사진이나 출생년도와 사망년도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대한제국]]시기와 [[일제강점기]]시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많은 부를 축적하여 지역 주지로서 많은 단체를 후원하였고 지역민들의 구호에도 솔선수범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최사영은 이 집을 1906년 건립하여 1929년까지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최사영 거주 이후 이 집은 최성렬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1941년에는 다시 마쯔시마에게로 이전되었다가 광복 이후 1946년에 김형종,1947년에 이윤영, 1971년 한국신탁은행, 1974년 이종승, 1980년 이을순, 1999년 코리아 프로덕트, 2001년 김정의·정기택 등으로 여러 차례 변화하였다. 이와 같이 최사영에 의해 세워진 이 집은『경성부관내지적목록』및 폐쇄 토지대장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는 407평(1,345.46㎡) 규모의 마포동 236번지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1946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토지 분할로 문화재 지정이 최초 검토되던 2001년 11월 당시에는 마포동 236-1번지(826.8㎡)에 본 건물 1동만 남아 있었다. 최사영에 의해 조성될 당시에는 본 건물 외에도 여러 동의 건물들이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몇 동의 건물이 어떠한 배치형태를 이루고 있었는지 현 시점에서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최사영은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위치한 [[최사영고택]]의 건립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최사영고택]] 건립 외에도 많은 부를 축적한 재력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고택 건립 이전부터 [[삼개]](현재의 마포동 236번지)에 거주하면서 [[지역유지]] 또는 [[신사]]로서1920년대 후반까지 생존, 활동하였다. 경제적 활동도 활발히 하여 대한제국 시기에 이미 금광업이나 금융업·창고업·진전 개간 등 각종 사업에 참여해 부를 축적하였고 일제 초기인 1911년에는 전국에서 50만 원 이상 자산을 소유한 한국인 32명 중 한 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권 상실 전에는 [[기호흥학회]]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나 [[보성 소학교]] 등 학교를 경제적으로 후원하기도 했고 국권 상실 후에는 경제적 곤란에 처한 [[독립운동가]] 가족을 돕거나 [[지역유지]]로서 수해를 당한 지역 주민들의 구호에도 솔선수범하였다.
  
고택의 현재모습[편집]
+
최사영이야 말로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부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약탈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단체를 금전적으로 지원해 주고 백성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인다.
  
이 집은 2001년 소유권 변동 과정에서 멸실 위기에 처하게 되자 2001. 11. 27 서울특별시 민속자료로 가지정, 보존된 후 2002. 3. 20 개최된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의 현상변경 허가 심의에서 이축 가결되어 2003년~2007년 한국가구박물관에 의해 현 부지 안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 고택은 마포에 위치할 당시부터 이 건물을 포함한 집의 전체 배치형태가 불확실했고, 건물 자체도 이미 일부가 변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 위치로 이전, 복원되면서 다시 일부 변형되었기 때문에 서울특별시 민속자료로까지 지정하기 어렵지만 건물 자체의 조형과 부재의 가공이 전체적으로 뛰어나고, 특히 부엌 외벽 의장의 짜임새와 장식이 아주 우수하여 당시 서울지역 최상위 계층 가옥의 조성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므로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
==활동내역==
  
고택의 건축양식[편집]
+
===경제적 활동===
  
이 건물은 그 가운데 안채로 추정되는 건물로서 홑처마 팔작지붕의 ‘ㄱ’자형 오량가 목조 기와집이다. 두벌대 장대석 기단 위에 다듬은 네모뿔대 초석을 두고 네모기둥을 세워 오량가로 가구하였다. 도리가 둥근 형태의 굴도리집이다. 이 건물의 구조를 알아보면, 건물 평면을 보면 건물 한 가운데에 위치한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향우측으로는 안방을 배치하고 다시 안방의 남쪽으로 꺾어져 정면 2칸, 측면 2칸의 부엌을 배치하였다. 부엌 위에는 다락을 설치했다. 한편 대청마루의 좌측으로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건넌방을 배치하고 건넌방 옆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누마루를 들였다. 궁궐 건축에서와 같이 대청 연등천장의 서까래 상부를 구조재와 동일한 재질의 골개판으로 막아 누수로 인한 지붕부 목재 훼손이 덜하도록 한 점, 대청마루 앞뒤로 각각 앞퇴와 뒤퇴를 두고 툇마루에 난간을 설치한 점, 그리고 부엌 출입문 용도의 판문과 그 양 옆의 판장벽, 머름과 머름 위 살창, 부엌 위 고창의 넌출창호, 부엌 선반을 받치고 있는 당초무늬 낙양 형태의 까치발 등이 한 데 조화를 이루도록 부엌 입면이 구성되도록 한 점 등은 서울 지역 다른 일반 사대부 가옥과 구별되는 이 건물만의 특징들이다
+
#[[대한제국]] 시기에 금광업이나 금융업·창고업·진전(陳田) 개간 등 각종 사업에 참여해 부를 축적하였다.
 +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년에 전국에서 50만 원 이상 자산을 소유한 한국인 32명 중 한 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
 
 +
 
 +
===사회적 활동===
 +
 
 +
#[[대한제국]] 시기의 품계가 정3품까지 올랐다.
 +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에 해당하는 [[중추원]]의 의관을 지냈다.
 +
#국권상실 직전인 1910년 8월 26일에 6등(六等)으로 서훈(敍勳)되어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
#국권상실 전에 [[기호흥학회]]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나 [[보성 소학교]] 등 학교를 경제적으로 후원하였다.  
 +
#국권상실 후에는 경제적 곤란에 처한 독립운동가 가족을 돕거나 지역 유지로서 수해를 당하 지역 주민들의 구호에도 솔선수범하였다.
 +
 
 +
==관련항목==
 +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
| [[최사영]] || [[노블리스 오블리주]] || [[최사영]]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았다. ||
 +
|-
 +
|}
 +
 
 +
 
 +
==참고문헌==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0370000,11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마포 최사영 고택]
 +
 
 +
==작성자 및 기여자==
 +
작성자 [[김민정]]
 +
 
 +
[[분류:인물]] [[분류:김민정]]

2018년 6월 18일 (월) 23:14 기준 최신판


최사영(18??~192?)

생애

최사영 인물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사진이나 출생년도와 사망년도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대한제국시기와 일제강점기시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많은 부를 축적하여 지역 주지로서 많은 단체를 후원하였고 지역민들의 구호에도 솔선수범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최사영은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위치한 최사영고택의 건립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최사영고택 건립 외에도 많은 부를 축적한 재력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고택 건립 이전부터 삼개(현재의 마포동 236번지)에 거주하면서 지역유지 또는 신사로서1920년대 후반까지 생존, 활동하였다. 경제적 활동도 활발히 하여 대한제국 시기에 이미 금광업이나 금융업·창고업·진전 개간 등 각종 사업에 참여해 부를 축적하였고 일제 초기인 1911년에는 전국에서 50만 원 이상 자산을 소유한 한국인 32명 중 한 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권 상실 전에는 기호흥학회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나 보성 소학교 등 학교를 경제적으로 후원하기도 했고 국권 상실 후에는 경제적 곤란에 처한 독립운동가 가족을 돕거나 지역유지로서 수해를 당한 지역 주민들의 구호에도 솔선수범하였다.

최사영이야 말로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부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약탈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단체를 금전적으로 지원해 주고 백성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인다.

활동내역

경제적 활동

  1. 대한제국 시기에 금광업이나 금융업·창고업·진전(陳田) 개간 등 각종 사업에 참여해 부를 축적하였다.
  2.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년에 전국에서 50만 원 이상 자산을 소유한 한국인 32명 중 한 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사회적 활동

  1. 대한제국 시기의 품계가 정3품까지 올랐다.
  2.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에 해당하는 중추원의 의관을 지냈다.
  3. 국권상실 직전인 1910년 8월 26일에 6등(六等)으로 서훈(敍勳)되어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4. 국권상실 전에 기호흥학회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나 보성 소학교 등 학교를 경제적으로 후원하였다.
  5. 국권상실 후에는 경제적 곤란에 처한 독립운동가 가족을 돕거나 지역 유지로서 수해를 당하 지역 주민들의 구호에도 솔선수범하였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최사영 노블리스 오블리주 최사영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았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마포 최사영 고택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김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