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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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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2호선 시청역 10번 출구에서 배재학당동관으로 도보로 5분이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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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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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
 
숭례문(崇禮門)

2018년 12월 6일 (목) 14:36 판

소개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 · 소의문 · 광희문 · 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한양도성의 역사

초기

성벽

1395년(태조 4년)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성벽을 처음 축조할 때 산지와 구릉에는 석성으로 쌓았고 평지에는 토성으로 쌓았었다. 1421년(세종 3년)에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등 대대적으로 고쳐쌓았다.

축성 시기

첫 번째 유형은 14세기말 태조 때의 성벽으로, 화강암이나 편마암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큰 돌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으며 수직으로 쌓아 올려 거친 느낌을 준다. 동북면의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서북면의 평안도의 민정 118,070명을 동원하여 지역별로 97개 구간으로 축성구역을 나누어 쌓았다. 두 번째 유형인 15세기 초 세종 때의 성벽으로, 아랫부분은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로 쌓고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전국에서 322,400명의 민정을 동원하여 평지의 토성을 전부 석성으로 개축하고 성벽높이를 보강, 여장도 완비하였다. 개천이 빠져나가는 부분도 水門을 2간 더 설치하였다.

중기

후기

한양도성의 탐방구간

백악구간

낙산구간

소개

  • 구간 : 혜화문~흥인지문
  • 거리 : 2.1km
  • 소요시간 : 약 1시간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낙산(124m)은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낮다. 생긴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겨 낙타산, 타락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낙산 구간은 경사가 완만하여 산책하듯 걷기에 적당하다. 특히 가톨릭대학 뒤편 길을 걷다보면 축조 시기별로 성돌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를 볼 수 있다.

  • 24시간 개방
  • 장수마을과 이화마을을 지날 때에는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 혜화문-한성대입구역 4번출구-계단-가톨릭대학 뒷길-장수마을-암문-낙산공원 놀이마당-이화마을-한양도성박물관(서울디자인지원센터)-동대문성곽공원-흥인지문


교통편 안내

혜화문 방향에서 출발하려면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분출구에서 낙산입구까지 도보로 3분이 소요된다. 순성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걷기에 편리하며 인접한 마을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지도를 불러오는 중...

구간 주요지점

혜화문

혜화문(惠化門)

한양도성의 북동쪽에 있는 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이었으나 창경궁의 정문 이름을 홍화문으로 지음에 따라 중종 6년(1511)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문루가 없던 것을 영조 때에 지어 올렸다. 문루는 1928년에, 홍예는 1938년에 헐렸는데 1994년 본래 자리보다 북쪽에 새로 지었다.

가톨릭대학교 뒷길




가톨릭대학교 뒷길

도성을 따라 걷는 길은 대부분 성 안쪽에 조성되어 있어서 주로 어깨 높이 정도의 여장만 보인다. 그러나 낙산 구간은 전 구간이 성 바깥에서 걸을 수 있게 조성되어 있다.(물론, 암문을 통해 성 안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특히 가톨릭대학교를 따라 이어진 성벽길을 걸으면 한양도성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한 세종 · 숙종 · 순조 연간의 축성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장수마을




장수마을

낙산공원 동남쪽 성벽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로 한국전쟁 후에 형성된 판자촌에서 기원한다. 60세 이상의 노인 거주 인구가 많아 장수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뉴타운 예정지였으나 주민투표로 뉴타운 재개발을 중단하고 마을재생 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주민들이 직접 집을 단장하고 골목길을 정비하여 지금처럼 산뜻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주민 참여형 마을재생사업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낙산공원



낙산공원

장수마을에서 암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이 나타난다. 낙산공원은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라 불릴 정도로 전망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과 야경은 특히 아름답다. 백악과 인왕산에서 서울의 원경이 보인다면, 이곳에서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도심을 느낄 수 있다.


이화마을



이화마을

이화마을은 낙산 구간 성벽 바로 안쪽에 있다. 지은 지 오래된 주택이 많고 골목도 좁아 낙후지역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2006년부터 정부 지원 하에 예술가들이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리고 빈터에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마을의 이미지가 밝고 화사하게 바뀌었다. 마을은 낙산 정상부까지 이어지는데 계단 끝에 오르면 한양도성이 울타리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성 안에 형성된 옛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공사실명제와 각자성석



공사실명제와 각자성석

축성과 관련한 글을 새겨 넣은 돌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 한다. 한양도성 전체 구간 중 동대문성곽공원 옆에 가장 많다. 성곽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각자성석들을 이곳에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태조 · 세종 때의 각자성석에는 구간명과 구간별 축성 담당 군현(郡縣)명이, 조선 중기 이후의 각자성석에는 감독관과 책임기술자의 이름, 날짜 등이 명기되어 있다. 오른쪽 사진의 각자성석들은 낙산 구간이 끝나는 부분의 도성 바깥에 위치해 있다.


한양도성박물관(서울디자인지원센터)



한양도성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동대문병원 일부를 철거하고 세운 서울디자인지원센터 1~3층에는 한양도성박물관이 있다. 방문객들에게 한양도성의 역사와 가치를 알려주며 순성 정보를 제공한다.

흥인지문




흥인지문

<보물 제1호> 한양도성의 동대문이다. 현재의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은 것이다.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였다. 동대문 바깥쪽으로 옹성을 하나 더 쌓은 것은 이 때문이다. 1907년 좌우 성벽이 헐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흥인지문구간

코스: 흥인지문-오간수문 터-이간수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 터)-동대문역사관-광희문-백구 컴퓨터 크리닝-천주교 신당동교회-장충체육관


거리:1.8km 소요시간: 약 1시간

흥인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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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서울 도성 정동(正東)쪽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른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霓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흥인지문 [Heunginjimun Gate, 興仁之門] (두산백과)

오간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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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동대문에서 중구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으로 수문이 5칸, 즉 5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가에 있는 동대문(흥인지문)에서 중구 을지로(乙支路)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이다. 오간수문은 수문이 5칸, 즉 5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대문 남쪽 성벽 아래로 흐르는 냇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치한 수문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설치하였다.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이다.

그러나 쇠창살에 부유물이 걸리고 토사가 쌓여 2개의 나무문을 별도로 세웠는데, 이 역시 영조 때에 이르러 거의 막혔다. 이 때문에 1760년(영조 36)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수문 앞에 쌓인 토사를 걷어내고 복원하였다.

그후 1907년(융희 1) 중추원에서 청계천 하수의 원활한 소통을 이유로 수문을 헐고, 이듬해 3월에는 동대문 근처의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의 성벽마저 헐었다. 대신 같은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를 세웠는데, 오간수문을 오간수다리·오간수교·오간수문교로 부르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따라서 오간수문과 오간수교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것이다.

오간수교는 1926년 다시 확장·건설되었으나,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虹霓: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2004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새롭게 만들어진 오간수교는 오간수문의 전통적인 모양을 살려 5개 수문과 무지개 모양의 홍예 아치를 재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간수문 [五間水門] (두산백과)

동대문역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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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성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일부이다. 2007년 12월 동대문운동장 철거 작업을 시작하면서 매장된 유물들이 출토되어 2008년 1월 문화재 발굴조사에 착수하였으며, 2009년 6월 발굴된 유물을 보존, 전시하기 위한 역사문화공원 조성을 발표하고 같은 해 10월 27일에 개장하였다. 부지 면적은 6만 5232㎡이며, 주요 시설은 동대문역사관, 서울 한양도성(서울 성곽)과 이간수문(二間水門) 유적,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이간수 전시장, 이간수마당, 갤러리문(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대문역사관에는 조선 전기에서 근대까지의 다양한 문화층에서 출토된 2575건, 2778점의 유물이 시대별, 발굴 지역별로 전시되어 있다. 또한 발굴된 유물들의 토층(土層) 탐험, 하도감(下都監) 터와 이간수문을 3D로 복원한 영상관, 유구지별 유물탐색 체험, 8면 바닥 영상, 유물발굴 체험, 동대문역사 백과사전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가 제공된다.

서울 한양도성(사적 10) 유적은 발굴된 265m 구간 중에 이간수문과 치성(雉城)이 포함된 142m 구간이 정비·복원되어 있고, 성곽이 멸실된 123m 구간은 지적도의 추정성곽선을 근거로 복원되었다. 이간수문은 남산 기슭에서 청계천 본류로 흐르던 남소문 동천 위에 세워졌던 2칸 구조의 수문으로, 1910~1915년 일제가 성곽을 철거할 때 묻혔다가 발굴된 것이다. 치성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돌출되어 성벽을 견고하게 하는 동시에 방어가 취약한 곳을 보완하도록 축조된 방어시설로, 한양도성 성곽에서는 처음 발굴된 것이다.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는 1925년 일제강점기에 건립되어 2007년 철거되기까지 근현대의 80여 년간 한국 스포츠의 산실이자 대중행사 및 기념행사 장소로 활용된 동대문운동장과 관련된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외부에는 1968년 보수공사 때 설치된 야간조명탑 2대와 1966년 서울에서 열린 제47회 전국체육대회 때 점화된 성화대가 보존되어 있다.

이밖에 이간수전시장(구 이벤트홀)은 소규모 전시회·음악회·콘퍼런스·행사 등을 위한 공간, 이간수마당은 예술 프로그램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며, 갤러리문은 디자인 전용 갤러리이다. 서울시에서 설립한 서울디자인재단에서 관리, 운영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대문역사문화공원 [Dongdaemun History & Culture Park, 東大門歷史文化公園] (두산백과)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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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문(屍軀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광희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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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에 한국에 들어온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 C.F.리드가, 이듬해 8월남감리교 중국연회(中國年會) 조선지방 장로사(長老師:현 監理師)로 임명되어, 이교회를 세웠다.

1897년 9월 10일 리드의 사택에서 제1회 조선지방회가 열려, 서울·개성 두구역으로 나누어 선교를 하기로 하였고, 서울구역은 교회부지를 위해 사두었던가옥을 개조, 교회로 사용하였다.

교세가 확장되자 1904년 10월 띠꿀(지금의 오장동)로 교회를 이전하고 청용교회라고호칭하다가, 이듬해 5월 광희문 근처에 2층의 붉은벽돌 교회당을 짓고 광희문교회로고쳐 불렀다. 1911년에는 교육선교를 지향, 광희문여학교를 세웠는데, 그것이배명(培明)중고교의 전신이었다.

일제강점기 말에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1942년 3월 강제 폐쇄되었는데,1956년에 이전의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신당동에서 재건, 광희문교회의 전통을이어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희문교회 [光熙門敎會] (두산백과)

남산구간

숭례문구간

소개

백범광장에서 숭례문을 지나 돈의문 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은 한강과 도성을 최단거리로 잇는 문이어서 사람과 물자의 통행도 가장 많았다. 1899년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숭례문은 더 이상 문의 구실을 못하게 되었고, 1907년에는 교통 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숭례문 양쪽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후에도 남대문로 주변에 대형 건축물이 들어설 때마다 성벽이 철거되어 숭례문 주변에서는 옛 성벽을 찾아보기 어렵다.

교통편 안내

  • 숭례문에서 출발

지하철 1·4호선 서울역 4번 출구 도보로 10분,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8번 출구 도보로 12분,

지하철 4호선 회현역 5번 출구에서 남대문시장을 통해 도보로 5분이 소요된다. 


  • 돈의문 터 에서 출발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7번 출구에서 도보로 15분, 지하철 2·5호선 서대문역 4·5번 출구에서 도보 5분이 소요된다.

시청역(1,2호선) 1,10,12번 출구 → 도보 5분 → 배재학당동관


지하철 2호선 시청역 10번 출구에서 배재학당동관으로 도보로 5분이 소요된다.

구간 주요지점

  • 숭례문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호> 한양도성의 남대문이자 정문이다. 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 완공하였고, 1448년에 개축하였다. 1907년 교통에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좌우 성벽이 헐린 뒤에는 문화재로만 남았다.

  • 남대문시장과 칠패시장

남대문시장은 1897년 1월에 개장한 한국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다. 남대문 밖에는 칠패(七牌) 시장이 있어 종루(종로4거리), 이현(흥인지문 안)과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시장 중 하나로 꼽혔다. 칠패라는 명칭은 이곳이 어영청 제7패의 순라길이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 소의문 터

사소문 중 하나로 도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다. 1396년 도성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다. 영조 20년(1744)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광희문과 함께 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다. 1914년 일제의 시구개수사업 과정에서 헐려 지금은 소의문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다.

  • 배재학당 동관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배재학당은 1885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설립한 학교로서 1886년 고종이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이다. 초창기 배재학당은 미국 문물 교류의 통로로서 수많은 근대 지식인을 배출하였다. 이승만·주시경·김소월·나도향·오긍선·신봉조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 구 러시아 공사관

고종 27년(1890)에 완공된 르네상스식 건물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정동의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고종이 1896년 2월 이곳으로 피신해 1년 간 머물렀다(아관파천). 한국전쟁 중 건물 대부분이 파손되어 탑 부분만 남았다.

  • 정동교회

<사적 제256호>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감리교회이다.

  • 돈의문 터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이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그 위치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다.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현재 돈의문 터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인왕산구간

소개

돈의문 터에서 시작해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지나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말한다. 대한 바위들이 노출되어 있는 바위산으로 치마바위, 선바위, 기차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다. 인왕산에서 인왕(仁王)은 불교식 명칭으로, 무학대사가 이 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3년 개방되어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다.

  • 구간 : 돈의문터~창의문
  • 거리 : 4.0km
  • 소요시간 : 약 2시간 30분
  • 24시간 개방(매주 월요일 휴무)
  • 장수마을과 이화마을을 지날 때에는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 돈의문 터-경교장-월암근린공원-홍파동 홍난파 가옥-편의점(구 옥경이식품)-암문-인왕산 곡성-인왕산 범바위-인왕산 정상-윤동주 시인의 언덕-창의문

교통편 안내

돈의문 터에서 출발하려면 한성대입구역을 기준으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서 서대문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와 도보 3분을 이동하시면 도착할 수 있다.

인왕산 교통편.PNG

구간 주요지점

옛 돈의문
보이지 않는 문

돈의문 터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이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新門)으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1915년 3월 6일 일제에 의해 경매를 하여 205원 50전의 가격으로 경성 염덕기(廉德基)에게 목재가 다 낙찰되어 팔려나갔고 석재는 도로의 개수에 사용하였고 고고학적으로 참고할 부속물들은 총독부에서 영구히 보존하기로 하였다 전해짐. 우리가 알고 있는 서대문(西大門)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이 시기부터 돈의문이라는 원래 이름을 잃고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1915년 6월 10일에는 마침내 돈의문의 남아 있던 홍예석까지 철거되면서 완전히 그 흔적이 사라지고 지금의 터만 남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서둘러 소의문과 더불어 돈의문을 헐어 없앤 이면에는 1915년 9월부터 경복궁에서 열기로 한 조선물산공진회를 준비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 현재 옛날 돈의문이 있던 자리에는 터만 남아있고 그 자리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경교장

경교장

종로구 새문안로에 있는 강북삼성병원 자리에 위치해 있다. 본래 이 건물은 1938년 일제 치하에서 금광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던 최장학이란 인물의 저택으로 건립되었다. 이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이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와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할 때 까지,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건물을 집무실과 숙소로 이용해서 실질적인 임시정부 청사로 이용하였다. 경교장(京橋莊)이라는 이름은 백범이 근처 개울에 있는 다리의 이름을 따서 고쳐지은 것이라 한다. 백범이 서거한 후에는 중화민국 대사관저,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 특수부대 및 임시 의료진 주둔 시설, 한국전쟁 종전이후 베트남 대사관 등으로 활용되고 1968년부터는 고려병원(1995년 강북성심병원으로 개칭)의 본관으로 사용되며 이 시기에 내외부가 병원으로 개조되면서 원형이 변형된 것이다. 이때부터 경교장을 보전하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1990년대부터는 문화재로 지정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2001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129호로 지정, 2005년에는 사적 제 456호로 승격되었다. 그 이후 2010년 경교장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에는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홍파동 홍난파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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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에 위치한 홍파동 홍난파 가옥은 유명한 작곡가 난파 홍영후가 살던 집이다. ′봉선화′, ′고향의 봄′ 와 같이 그의 대표곡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작곡된 장소이고 1930년대 서양식 주택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2004년 9월 4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사직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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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서울에서 가장 먼저 생긴 터널로 광화문을 조금 지나서 인왕산 자락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한양 도성 성벽은 바로 이 사직터널부근에서 끊어졌다가 터널 남쪽 주택가 골목에서 다시 이어진다. 터널 북쪽에 조선시대에 조성된 사직단이 위치해 있어서 사직터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딜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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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또는 앨버트 테일러 가옥은 미국인 금광 기술자로 서울특파원을 겸하며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가 짓고 거주(1923~1942)했던 서양식 건축물이다. 딜쿠샤는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이 건물의 내력은 2006년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방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딜쿠샤 바로 옆에는 수령 45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의 집에 있던 나무로 전해지며, 행촌동이라는 지명도 이 나무에서 유래한다. 2017년 8월 8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에는 저소득층 12세대가 거주해 오다가 퇴거하고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인왕제색도

인왕산 순성길

해발 338m의 인왕산(仁王山)은 한양도성의 내사산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서북쪽에서 북쪽을 따라 내려오는 산이다. 조선 초기에는 서산, 중종 이후로는 필운산으로 불렸다. 인왕산은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가 한양을 도읍터로 잡고 인왕산을 강력한 진산후보로 내세울 정도로 중요시 여겼다. 비록 정도전의 반대에 한양도성의 진산이 되지는 못했지만 백악산의 서편에 위치한 우백호가 되었으니 그 중요성은 여전히 크다 할 수 있다. 인왕산 정상에서 한양도성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전역이 한눈에 들어와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다.

인왕산과 관련되어 정선은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이라 칭해지는 인왕제색도라는 그림을 그려 현재 국보 제 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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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으로 인왕산 자락 서쪽 끝, 창의문 부근에 위치해 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해 그가 이 일대를 거닐며 시상(詩想)을 가다듬었을 것으로 보아 이 자리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였다. 언덕 위에 그의 대표작 ‘서시’를 새긴 커다란 시비가 있으며, 가까이에는 윤동주문학관도 있다.


최규식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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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태로 순직한 최규식의 동상이 창의문 앞 길가에 위치해 있다. 1.21사태란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은 북한군과 교전 중 창의문에서 순직하였다. 최규식 동상은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동상이다. 이 사건 이후 백악과 인왕산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1994년 인왕산, 2007년 백악이 각각 다시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현재도 이용하고 있다.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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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彰義門)은 도성의 서북쪽을 지키는 문으로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있는 문이다. 창의문도 다른 도성문들처럼 임진왜란 당시 문루가 없어지고 망가져 있었다. 영조 17년(1741년) 1월에 창의문의 홍예석 깨진 것과 문비를 고치고 문루를 짓는 공사가 진행 되었다. 인조반정 때에는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간 지점에는 북단이라고 하는 제단이 있는데 이는 기우제나 제사를 받지 못하는 원혼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다. 군사화가 되고 또 제의 기능이 발전하면서 북교는 임금이 친림하여 쏘기를 하거나 친히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 등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 되었다. 그럴 때 창의문은 임금이 출입하는 문으로 쓰였다.

현재는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


한양도성 이야기

안이토리 애사

도성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각자는 약 300개 정도 된다 한다. 여기서 각자는 성벽의 지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이다.

목면산 동쪽 기슭, 각자가 많이 남아 있는 구간에 안이토리(安二土里)라는 이름이 새겨진 각자가 두 군데 있다. 석수인 안이토리는 평민으로 추정되고 석수로서 실력을 인정받아서 도편수에는 못 미치지만 편수가 되어서 도성 각자에 세 번이나 등장하였다. 특이하긴 하지만 여기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안이토리라는 이름이 도성의 각자가 아닌, 공식 기록물인 승정원일기 1711년(숙종37년) 4월 8일자에 등장하였다. 다른 소식도 아닌 부음(訃音) 즉 죽었다는 소식으로 말이다. 석수로서 여기저기서 도성 쌓는 일을 하고 석수로서 실력을 인정받아 편수의 자리에도 올라간 안이토리는 광화문을 짓는 공사를 하다가 돌에 깔려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 안이토리의 나이가 얼마인지, 가족 관계가 어떠한지와 같이 그의 인생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는 찾기 어렵고 어디 남아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저 도성 쌓는데 인생을 바치다가 종국에는 목숨을 바친 일꾼 안이토리로 기억될 것이다. 그런데 안이토리 씨는 그나마 각자로 남고 승정원 일기에 도 이름넉자가 올라갔으니 이렇게 기억이라도 할 수 있지 도성을 쌓고 고치고 하는 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땀과 피를 바치고 사라져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지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한양 도성은 누가 쌓았는가 물어보면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쌓았다라고 답할 수 있다. 임금도 한몫 하고 관료들도 장수들도 맡은 일을 하였다. 하지만 가장 큰 몫은 돌을 떠서 나르고 쪼아서 모양을 만들고 땅을 파고 다지며 도성을 쌓아 올린 백성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도성은 수많은 안이토리들의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북정마을

한양도성에서 가장 높은 부분인 백악(북악)구간의 와룡공원 지나서 암문을 나선 곳에 자리잡은 북정마을 만해 한용운선생의 거처였던 심우장과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를 품고있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입니다.

동대문의 옛 이대부속병원 자리에 들어선 한양도성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2015년 2월 15일까지 한양도성 마을 특별전으로 북정마을과 함께 낙산공원 부근의 장수마을을 소개했는데 북정마을은 1766년(영조 42년), 성북동 일대에 어영청 북둔을 설치하고 군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나라에서 거주할 사람들을 모집하여 정착시키는 것으로 마을이 시작되었다 전해집니다.

1933년 옥고를 치루고 나온 만해 한용운선생이 심우장을 지어 1944년 임종할 때까지 거처로 삼은 곳도 북정마을 가파른 골목길 안이고 김광섭시인이 노래한 성북동 비둘기도 북정마을의 상징이 되어있습니다.

1950년 6.25전쟁 이후 피난민촌이 형성되기도 하고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도시노동자들이 모여들어 지금의 북정마을이 만들어졌는데 옛 물길이 지나던 원형도로를 중심으로 약 500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2004년 주택재개발예정지역으로 지정되면서 한옥타운주택재개발 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40년 이상을 북정마을에 살면서 공동체생활을 해온 마을주민들은 마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발하려고 하여 갈등이 심한 듯 여러 곳에서 펄럭이는 현수막과 대자보들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방문해보시면 성곽과 더불어서 성곽길로 산책도 가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방문해보시면 성곽마을이라는 이름이 왜 붙여졌는지 이해를 어느정도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한양도성의 오늘날

한양도성의 관리, 활용

한양도성의 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