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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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홍우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4일 (화) 09:1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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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1888~1968)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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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활

독립활동

홍범식 유언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에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 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그는 항일의식을 자결로 실천한 아버지가 남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그대로 받들어 실천하였다. 홍명희는 1913년 정인보 등과 함께 상해로 건너가 해외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에서 활동했고, 홍명희는 제 1 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인 1914 년 11 월 상하이를 떠나 남양으로 향하여 김덕진 정원택 김진용과 함께 일화 배척운동에 참가. 1919년 3월 괴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반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충청북도 최초의 3.1운동 참여). 항일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루면서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 근무,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을 보고 왔으며 1927년 신간회 창설에 참가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신간회 활동

홍명희는 민족해방운동이 분열되고 연정희가 부활을 기도하는 상황에 민족협동전선이 필요하 다는 인식에 따라 1927 년 1 월 29 일 권동진 · 김준연 · 문일평 · 신석우 · 신채호 · 안재홍 ·이관용 · 이승복 · 한기악 · 한용운 · 한위건 · 홍성희 등 28 인의 명의로 신간회 발기를 정식 공표하였다. “신간회 운동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민족협동전선 운동의 첫 시발로서 의의가 크다

벽초가 일제 하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그는 1927년부터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힘을 합친 민족유일당운동인 신간회를 이끌었다. 벽초와 함께 ‘조선 3재’라 불렸던 최남선 이광수가 일찍이 일제에 투항하여 조선청년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는 동안 그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고 민족개량주의자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길을 걸었다.

홍명희는 1926 년 10 월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신간회 운동에 전념하였는데, 그의 가족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시련을 겪고 있던 홍명희는 안재홍의 권유로 1928 년 11 월부터 『조선일보』에 역사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생활을 떠난 문예는 생활의 문예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임꺽정』에 강하게 반영하였다.

정치활동

기타(수상내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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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어(S) 목적어(O) A는 B를 ~하다(P)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

권순영, 김민우, 김연정, 노홍우, 최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