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8번째 줄: 8번째 줄:
 
==피해==
 
==피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6.25전쟁으로 인해 전사한 한국군의 수는 약 137,899 명으로 집계되었다. 부상자와 실종자를 포함한 한국군 피해자의 수는 약 621,479명에 달한다. 6.25전쟁으로 인해 수 많은 이산 가족, 전쟁 고아, 전재민이 생겨났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6.25전쟁으로 인해 전사한 한국군의 수는 약 137,899 명으로 집계되었다. 부상자와 실종자를 포함한 한국군 피해자의 수는 약 621,479명에 달한다. 6.25전쟁으로 인해 수 많은 이산 가족, 전쟁 고아, 전재민이 생겨났다.
 
[[분류:사건]][[분류:최선주]]
 

2019년 6월 16일 (일) 07:59 판

6.25 전쟁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이다. 6월 28일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강 교량이 폭파되었다. 북한군의 발은 잠시 묶어둘 수 있었으나 그곳에 있던 한국군과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시민들의 피해가 컸다.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 UN군의 지원을 받게 된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이윽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 28일에 다시 서울을 수복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38선을 돌파하여 평양까지 탈환한 뒤 압록강 국경지대까지 이르렀지만, 북한과 중공군에 의해 다시 서울이 북한군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에도 38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전쟁 발발 1년 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전쟁이 계속되었다. 1951년 7월부터 휴전 협상이 시작되어 2년간 이어졌다. 이후 전쟁 발발 약 3년 1개월 이후만에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6.25 전쟁 참전국

당시 6.25전쟁에 참전한 UN참전국은 총 16개국 (미국, 캐나다, 콜롬비아,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남아공화국, 에티오피아, 아프리카,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베르그, 네덜란드, 터키)이다. 휴전 협정 전까지 전쟁에 참여한 연합군은 341,000여 명이다. 이 외에도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에서 의료와 식량 등을 지원하였다.

피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6.25전쟁으로 인해 전사한 한국군의 수는 약 137,899 명으로 집계되었다. 부상자와 실종자를 포함한 한국군 피해자의 수는 약 621,479명에 달한다. 6.25전쟁으로 인해 수 많은 이산 가족, 전쟁 고아, 전재민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