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대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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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개요

대한문 大漢門 (大漢 : 한양이 창대해진다)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70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서쪽으로 물러 앉게 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 복원한 것이다.

건립시기·연도

조선 말기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관련 영상

역사적 변천

덕수궁은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을 짓기 전에는 임시로 즉조당(卽祚堂)을 정전으로 사용하고, 3문(門)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인화문을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명례궁(明禮宮)을 옛 이름인 경운궁(慶運宮)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2년(광무 6) 들어 궁궐을 크게 중건하면서 정전인 중화전·중화문·외삼문(外三門)인 조원문(朝元門)을 세워 법전(法殿: 임금이 백관의 경축일 하례를 받는 정전)의 체제를 갖추었다. 얼마 뒤 인화문 자리에는 건극문(建極門)을 세우고 조원문 앞 동쪽에 대한문의 전신인 대안문(大安門)을 세워 새로 정문으로 삼았다. 1904년(광무 8) 함녕전(咸寧殿)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자 1904년에서 1906년(광무 10)에 걸쳐 이를 다시 중건하였고, 1906년 4월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수리하면서 겹처마에 단청을 하였으며 지붕마루에 양성(兩城)을 하고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얹었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南廷哲)이 썼다.
1914년 도로를 건설한다는 이유로 문 오른쪽에 있던 건물 및 담장이 모두 일제에 의하여 크게 파괴되었고, 이때 대한문도 궁 안쪽으로 옮겨졌다. 또한 1970년에도 도시계획으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 앞에는 돌짐승을 배치한 계단을 두어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었었으나, 지금은 계단 및 기단이 아스팔트 속에 묻혀 버린 채 돌짐승만이 땅 위로 드러나 있다.

여담

  • 건립 당시에는 오른편에 군권을 통할하는 원수부(元帥府) 건물도 있었다. 2층 벽돌식이자 병영식 건물로 지어져 있었으나 1912년 태평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철거되었다.
  • 현재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진다.
  • 현대에 와서는 인접한 서울광장과 함께 시위 장소로 종종 사용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후반 이명박 정부 시절과 박근혜 정부 시절 이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에는 대한문 앞 광장에 시민들이 분향소를 설치했고 이후에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시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시위, 이재수 전 국군기무사령관 추모 분향소 설치 등 진보와 보수단체의 시위가 잇달아 열렸다. 결국 서울시에서 이를 막기 위해 광장 일부 인도에 화단을 설치해서 시위대가 광장에 텐트를 설치하지 못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