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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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김홍도는 조선 영조 때의 화가이며 정조 시대 때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여겨진다.


설명

본관은 김해이며, 호는 단원·단구·서호·고면거사·취화사·첩취옹이다. 김홍도의 호로 가장 유명한 단원(檀園)은 명나라의 문인화가 단원 이유방의 호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는 그의 호 단원을 따온 이름이다.

생애

1745년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났다. 강세황은 김홍도의 화업에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 강세황은 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김홍도가 정조의 어진(御瞋)을 제작하는 명예를 누리도록 해주기도 했고, 이것은 김홍도가 화원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강세황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한 김홍도는 20대에서부터 이미 화명(畵名)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조의 어진을 그린 공으로 1773년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로 임명되며, 30세 되던 해인 1774년에는 종6품의 관직인 별제(別提)로 임명받게 된다. 1776년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고, 1781년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서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공으로 김홍도는 와서(瓦署) 별제로 임명된다. 김홍도가 40세가 되던 해인 1784년에는 경상도 안동의 안기역(安奇驛) 찰방(察訪)이 되어 2년 5개월 정도 근무하였다. 48세가 되던 해인 1791년에는 충청도 연풍의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51세의 나이가 되던 1795년에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만 3년만에 파직됐다. 50대의 나이로 관식 생활 이후 다시 화원으로 활동했다. 그 후 많은 그림을 그렸고 화가로 인정받았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조희룡의 <호산외사>는 이런 김홍도의 모습을 잘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정확한 사망은 모르지만 1806년도로 추측되고만 있다.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내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조희룡, <호산외사>

작품

김홍도는 특히 산수화, 풍속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였지만, 모든 분야에서 독창적인 회화를 구축한 화가이기도 하다. 주로 어명·고관의 명, 양반의 청탁을 받아 그림을 그렸지만,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가로 우리에게 주목받고 있다.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 25점을 모아놓은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도 있다. 또한 그는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고 시도 써서 아들 김양기가 출판한 <단원유묵>이라는 문집도 있다.

영상

작성자

박하은

출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