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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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2016)


영화의 역사적 배경

영화 <덕혜옹주>는 대한제국 제 31대 국왕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는 한국의 근현대사와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아들인 순종의 왕비로 태어났으며, 일본의 강점기 동안 일본인 신사들과 결혼을 강요당했다. 그녀는 일본인과 결혼하지 않고 독립운동가인 이제봉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으며, 한국 독립운동에 기여한 독립 지도자들과 함께 활동했다. 영화 <덕혜옹주>는 덕혜옹주의 영기와 희생,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대한 저항을 다루고 있다. 그녀의 삶을 통해 한국 역사에서 근현대의 사회적 변화와 식민지 지배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소개

예고편

줄거리

역사가 잊고 나라가 감췄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고종황제의 외동딸로 태어나 대한제국의 사랑을 받은 덕혜옹주. 일제는 만 13세의 어린 덕혜옹주를 강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한다. 매일같이 고국 땅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던 덕혜옹주 앞에 어린 시절 친구로 지냈던 장한이 나타나고, 영친왕 망명작전에 휘말리고 만다. 그녀는 가족과 나라를 위해 희생과 저항을 감내하며 일본의 압박에 맞서 싸운다. 덕혜옹주는 자신의 역사적인 존재와 사명에 대해 갈등하면서도 일제의 억압과 한국 독립을 위한 투쟁에 힘쓴다. 그녀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을 겪으며,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일본에 대항하고 조국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싸운다.

인물 설명

  • 주요 실존 인물

덕혜옹주 (배우 손예진)

  • 덕혜옹주 (배우 손예진)

"나는 낙선재에 오래 오래 살고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고종의 고명딸. 순종,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이다. 생모는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이다.


김장한 (배우 박해일)

  • 김장한 (배우 박해일)

"절대 뒤돌아보지말고 앞만 보고 달리셔야 합니다."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 친구이다.


소 다케유키 (배우 김재욱)

  • 소 다케유키 (배우 김재욱)

"그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이다."
대한제국의 덕혜옹주의 전 남편이다.


  • 그 외 영화 속 인물

영화로 보는 역사

실제 역사와의 차이점

  • 한일 강제 병합 후 궁궐 내 남자 직원(내시, 대령숙수 등)은 모두 쫓겨나고 궁녀들만 남았다. 따라서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는 날 그 앞에서 우는 내시들은 고증 오류다.
  • 영화 내에서 일본어로 옹주를 부를 때도 옹주의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지만, 실제론 덕혜의 일본어 발음을 더해 '도쿠에 히메(德惠姬)'라 불렸다. 올케 이방자의 회고록을 봐도 알 수 있다. (히메는 신분 높은 사람의 딸을 호칭)
  • 극 중 직접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남자 주인공 김장한의 아버지의 이름이 김황악이라고 언급되었는데 실제 김장한의 아버지 이름은 김정진(金珽鎭)으로 김황진의 동생이다. 김황진 - 김정진 형제는 신 안동 김씨로 26세 '진(鎭)'자 돌림을 쓴다. 제작진이 이런 점까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김장한 아버지의 이름을 김황진의 황을 따서 가상으로 지은 듯하다.
  • 고종이 어린 장한을 밤늦게 따로 불러 얘기할 때 자신의 딸을 덕혜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고종은 덕혜옹주가 덕혜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지도 몰랐다. '덕혜(德惠)'는 고종 사후 2년 뒤인 1921년 5월 4일에 이복오빠 순종황제가 내려준 봉호이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고종은 덕혜를 '아기'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만, 극 중 진행 상 아무래도 그냥 "아기야"라고 부르긴 무리였던듯 하다. 실제로 여러 회고록 등을 보면 어린 시절의 덕혜옹주는 그저 '복녕당 애기씨'로 통칭된다.
  • 덕혜옹주가 조선인 노무자들 앞에서 자신을 조선의 옹주 이덕혜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있다. 이를 고증 오류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일제강점기에 나온 몇몇 자료들에 덕혜옹주를 이덕혜로 부른 용례가 보인다.다만, '덕혜(德惠)'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본명이 아니라 순종이 내린 작호였고, 1931년 소 다케유키(宗 武志)와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에 작호를 붙여 '소 도쿠에(종 덕혜, 宗 德惠)'로 불리운 것을 시작으로, 1956년 이혼하고 나서 어머니 귀인 양씨의 성을 따라 양덕혜(梁德惠)로 바꾸고 1962년 국적을 회복하여 귀국하고 나서야 이덕혜(李德惠)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널리 쓰였다. 즉, 이덕혜가 틀린 건 아니다만, 차라리 그냥 덕혜라고만 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 영화 초반부, 덕혜옹주가 기모노를 바꿔치기 했을 때, 한택수가 높으신 분들에게 당하는 장면이 있다. 그 때 '내선일체를 홍보할 수 있다면서 큰소리 쳐놓고 뒤통수를 맞다니'라는 대사를 하는데, 내선일체라는 용어가 제대로 반열에 오른 시기는 1937년부터였다. 덕혜옹주가 유학을 가던 시기는 1925년인데, 이 장면에 나오던 시기도 대략 1925년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 마지막에 덕혜옹주가 귀국하는 길 탑승한 비행기가 무려 제트기에 이코노미 3-3-3배열 광동체기다. 광동체기 자체가 1969년에 데뷔한 물건이며, 3-3-3배열이 최초로 적용된 물건도 1995년 나온 보잉 777이다.
  • 가장 두드러진 허구는 영화에서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장면인 덕혜옹주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 영친왕과 함께 중국 상하이 망명을 추진했다는 대목이다. 실제로 망명 시도를 한 건 의친왕 이강이다.
  • 영화에서는 영친왕 부처가 덕혜옹주를 계속 데리고 산 것처럼 묘사하지만 이는 실제와 다르다. 이방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일본에 온 직후에는 가쿠슈인에 편입하기까지의 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함께 살았으며, 가쿠슈인에 다니는 동안 아직 어리고 그동안 여러 일로 충격이 컸을 옹주를 위해 자신들이 데리고 보살피겠다는 영친왕 부처의 요청을 일본이 거절하고 바로 기숙사로 보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 부처가 덕혜옹주와 함께 지낸 시간은 귀인 양씨가 사망한 해의 여름방학까지 포함해도 지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 덕혜옹주가 가쿠슈인을 졸업했는데도 귀국시키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나, 사실 옹주는 이미 이 시점에서 신경쇠약으로 인해 등교 거부 상태였다. 설상가상 졸업 이전의 시점이던 이때는 이미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데다 혼담까지 오가고 있어 당시에는 가쿠슈인을 끝까지 다니지 못했다. 덕혜옹주가 학업을 마친 건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 이듬해인 1931년의 일이다.
  • 영화에서는 덕혜옹주가 일본에 처음 간 뒤 1960년대까지 처음엔 친일파 때문에, 나중엔 한반도 정부의 반대로 조선 땅을 한 번도 밟지 못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덕혜옹주가 어머니 귀인 양씨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1929년 6월 2일 조선에 잠시 귀국한 적이 있다.
  • 실제 덕혜옹주는 이미 10대 때부터 정신병 증상이 시작되어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닐 정도였지만, 영화에서는 못 볼 꼴을 계속 보고 충격이 누적되면서 세월이 꽤 지나서야 발병하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작중에서 그런 묘사가 처음 나오는 건, 딸 정혜가 꽤 큰 1945년 이후로 나온다.
  • 김장한이 행방이 묘연한 영친왕 부처를 추적하여 실종된 덕혜옹주를 수소문하려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 속 김장한의 해방 이후 후기 행적의 모티브가 되는 김을한의 회고록에 의하면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 있는 것을 알려준 건 소 다케유키가 아니라 영친왕으로, 당시 돈으로 월 1만 엔에 달하는 거액의 병원비를 다달이 지불한 것도 영친왕이라고 한다. 전 남편 소 다케유키는 당시 김을한의 전화에 병원에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고 끊었다고 하며, 덕혜옹주를 찾기 위해 김을한이 소 다케유키를 직접 찾은 일은 없다고 한다. 참고로 김을한이 덕혜옹주의 행방을 확인한 건 그가 도쿄 특파원으로 건너간 1950년대 초반 무렵이라고 한다.
  • 소 다케유키와의 맞선과 웨딩드레스를 보러 가는 신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자가 즐거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영친왕 부처 모두 자신들에 이어 어린 옹주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든다며 해당 혼사를 굉장히 불쾌히 여기고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특히나 이 시기 이미 몽유병이나 신경쇠약을 비롯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옹주를 치료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창수가 자신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결혼을 서둘러 진행한 탓에 옹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더욱 반대를 해서 어떻게든 혼담을 깨려 노력했다고 한다.
  • 덕혜옹주는 영화에서처럼 밥을 지으러 가는 일이 없었다. 일본이 패망하기 전 소 다케유키는 화족(귀족)이었고, 일제의 귀족은 기본적으로 저택에서 살며 몇 명의 하인들을 고용한다. 정신병을 앓아온 덕혜옹주는 항시 요양 상태였고, 패망 후에는 보살펴 줄 하인을 고용할 처지가 못 되어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제 몸을 건사하지도 못하는 덕혜옹주가 가사를 했을 거라 볼 수 없다. 더욱이 가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딸 정혜의 양육이 가능했을 리가 없는데, 딸 정혜와 평범한 모녀로서의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나오는 것 역시 모순이다.
  • 덕혜옹주가 조선 옷이 아니란 이유로 기모노를 거부하고 평생 한복과 양장만 입었다는 묘사는 오류다. 옹주가 조선에서 다녔던 히노데(日出) 소학교는 일본인 학교였고 기모노 착용이 의무였기에, 옹주도 기모노를 입고 다녔다.
  • 영화상 한택수는 경찰인것으로 나오지만, 그의 모티브인 한창수는 주로 외교분야에서 근무했다.

영화 선정 이유 및 영화의 의의

  •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적절히 섞은 '팩션(faction)'으로 관람객들은 허구와 사실을 구분하고 내용을 공감할 필요성이 있기에 이 영화를 선정했다. 또한, 이 영화는 예술적인 표현과 아름다운 영상미를 통해 감정과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다. 덕혜옹주의 내면 세계와 갈등, 사람과 용기를 예술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여 관객에게 깊은 감동과 영감을 전달한다.
  • 이 영화는 다양한 의의와 가치를 담고 있다.
    • 첫째, 한국의 역사와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덕혜옹주의 삶을 통해 한국의 식민지 시대와 독립운동의 어려움과 투쟁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독립을 위한 희생과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둘째, 힘과 자주적인 선택을 강조한다. 덕혜옹주는 자신의 가치와 원칙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거부하고 독립운동가와 결혼하는 선택을 한다. 이를 통해 여성의 자율성과 독립적인 결정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 셋째, 가족의 사랑과 희생을 다룬다. 덕혜옹주는 가족과 조국을 위해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힘을 내어 투쟁한다. 가족의 사랑과 희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