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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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도

화조화와 장식화의 소재로 애호된 모란꽃을 그린 그림

역사

기원

모란(牡丹)은 꽃이 크고 그 색이 화려하여 동양에서는 고대부터 꽃 중의 왕으로 임금을 상징하며, 부귀화(富貴花) 등의 별칭으로 알려져 왔다. 중국 진한 시대 전에는 약재로 활용되었으나 남조(南朝) 대에 이르러 관상화로서 문헌에 처음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선덕여왕당나라의 태종(太宗)이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도〉와 모란의 씨앗을 보냈다는 내용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한다. 이때 선덕여왕은 모란도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라 말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제작된 단독 모란도는 현재 전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중국 송대(宋代)에 주돈이(周敦頤)가 〈애련설(愛蓮說)〉을 지으면서 모란을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묘사하면서 문예의 제재로 큰 인기를 끌었다. 아울러 송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고려 왕실에서도 모란의 인기가 높아 도자, 공예, 복식, 건축 등의 의장(意匠)에 중요한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모란도는 여러 맥락에서 제작되어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의 수가 상당하다. 조선시대 그림 속 모란은 새와 풀, 모란이 함께 어우러지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조선 초~중기에 자주 그려졌던 이러한 전통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조선 후기에는 모란의 비중이 커지고 풍성함이 강조되며, ‘채색모란도’와 먹으로만 그린 ‘묵모란도’로 다채롭게 그려진다. 조선 말기에는 모란만 단독으로 그려지는 모란도가 유행했다. 모란 병풍은 조선시대 왕실에서의 종묘제례, 가례(嘉禮, 왕실의 혼례), 제례(祭禮) 등의 주요 궁중 의례와 행사 때 사용되었다. 강세황(姜世晃), 심사정(沈師正), 최북(崔北), 허련(許鍊, 1809-1892) 등 문인화가들이 그린 수묵 모란도신명연, 남계우 같은 문인화가들이 그린 채색 모란도가 크게 유행했었다.

가치

모란도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며 궁중 회화민화에서 두루 인기 있는 화제로 그려졌다. 문인화로도 수묵 혹은 채색으로 그려져 여러 계층에서 인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모란도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시대와 계층에서 각기 다른 미감을 반영하며 첩, 축, 병풍으로 제작이 이루어졌다.

모란도

모란도 10폭 병풍

모란도 8폭 병풍

허련필 모란도

참고 영상

출처

  1. 국립중앙박물관, 모란도
  2. 국립고궁박물관, 모란도 병풍
  3. 국립중앙박물관, 허련필 모란도

작성자

이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