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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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北學派)


개요

  • 조선 후기에 청나라의 학술, 문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의 물질 경제를 풍요롭게 하고 삶의 질을 높일 것을 주장한 학풍이다.

개설

  • 북학이라는 용어는 맹자의 등문공장구에서 유래한다. 남쪽의 초(楚)나라 사람 진량이 북으로 중국에 유학해서 용화변이를 꾀했다는 내용으로, 북쪽의 선진 문명을 배운다는 의미에서 '북학'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 18세기 조선의 일부 학자들이 북학을 주장한 것은 청나라를 적대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선진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조선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원과 변천

  • 북학을 주장한 사람을 북학파라고 한다. 이들은 18세기 서울, 경기 지역에서 발달한 낙론계 학통 속에서 성장했거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들이다.
  • 홍대용이 북학의 논리를 키운 것에는 중국 북경으로의 연행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북경에서 청나라 학자인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사귀었고 그 과정에서 경의, 성리, 역사, 풍속 등에 대해 토론하며 새로운 사유를 체험하여 지식을 넓혔다.
  • 홍대용은 유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담헌서」, 「유포문답」, 「건정필담」, 「의산문답」 등의 북학 사상을 담고 있는 문집을 저술하였다.
  • 박지원은 이용후생을 강조하여 도덕 제일주의, 도덕 근본주의에 대한 반성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사회적 생산력을 제고하고 조선사회 경제력을 확대하여 민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논리였다. 특히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농업 생산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 박지원은 북경, 열하 여행 체험을 「열하일기(熱河日記)」로 남겼는데, 이 속에는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 박제가는 홍대용, 박지원의 주장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북학을 주장하였다. 그가 정조에게 바친 「북학의(北學議)」는 북학 논의의 결정판이었다. 농법 개량과 대외통상의 진흥을 주장하였고, 생활의 질을 높이기를 기대하였다.

북학 관련 참고 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북학의 열하일기 등

북학파 관련 영상

참고자료 및 추천자료

"북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학파" - <우리역사넷>

관련자료

인물 김정희
작품 김정희 필 난맹첩
학문 북학파
예술 추사체
기거지(유배) 봉은사

작성자

  • 이재호에 의해 작성된 페이지입니다.(2022.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