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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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성당

서울 명동성당

공공누리 제1유형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 정보 사적75호 서울 명동성당 (1977-11-22 지정)
시대 대한제국시대
소유자 및 관리자 (재)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
소재지 서울 중구 명동2가 1-8번지
홈페이지 명동대성당 http://www.mdsd.or.kr

국가문화유산포털



소개

서울 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한국 가톨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으로 순교 성인들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한국 가톨릭의 대표 성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양식으로서 사적 258호인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명동대성당은 1894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8년 완성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조교회당으로서 순수한 고딕양식 구조로 지어졌다. 군사 정권 시대를 지나면서 민주화투쟁의 중심지로 더 많이 인식되어 왔으나 지하성당에는 엥베르 주교, 모방신부, 샤스탕신부 등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거룩한 성지이다.

조선 고종 29년(1892)에 건축이 시작되었으나 청일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898년에 완공된 것으로 건평 454평에 종탑 높이 45m, 건물 길이 69m, 폭 28m, 지붕 높이 23m로 지붕은 동판이다. 라틴 십자형 三廊式의 고딕 건물이다. 주교관은 성당보다 더 이른 1890년에 세워졌는데 유럽식 2층 건물로 간소하면서도 발코니 등에 운치를 주고 있다. 면적은 199평으로 현재 카톨릭 출판사로 사용되고 있고 모두 꼬스트(G.Coste) 신부의 설계이다. 黃玹이 지은 《梅泉野錄》에 따르면 벽돌을 쌓는 일은 중국에서 데려온 벽돌공과 미장이에 의존하였으나 벽돌은 용산 공장에서 20여 종의 모형을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특징

1900년 9월 10일 베르뉘(Berneux)주교 등 병인박해시 순교하신 순교자들의 유해를 용산신학교로부터 대성당 지하묘소로 안치하였으나 이후 연고지로 옮겨 모셨고, 1926년 기해교난과 병오교난시의 순교자 79위의 영광스러운 시보식후 복자들의 유해를 지하묘소에 모신후 대성당 좌측 회랑에 복자제대를 설치하고 79위 복자 성화를 모셨다. 1950년 전쟁 때에 대성당이 인민군에 점거되어 지하묘소에 안치중인 순교자 유해가 손괴당하기도 하였다. 1991년, 퇴락한 유해의 포장, 부식된 납관 등을 새로 제작, 유해를 안치한 후 봉인하여 석관에 모시고, 이를 새로 말끔히 단장한 현실에 모신 후 각 현실마다 비명을 적은 석판을 세움으로서 마무리하였고 수시로 순례자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묘역의 입구를 유리문으로 개조 설치하였다. 현재 모셔져있는 성인 및 치명자의 유해는 기해박해(1839년)시 순교하시고 1984년 시성되신 성 엥베르(Imbert) 주교, 성 샤스탕(Chastan) 신부, 성 모방(Maubant) 신부, 성 김성우(안토니오),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등 다섯분의 성인과 병인박해(1866년)시 순교하신 파리외방전교회 Pourthie J. Antoine 신부, Petitnicolas M. Alexandre 신부 등 2분과 무명 치명자 2분 등 총 9분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TourAPI 3.0

이미지

박물관 아카이브 자료

  • 우리가족 역사일기

'공공누리 제1유형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제작한 "우리가족 역사일기"에 실린 명동성당 일러스트이다.

출처:현대사 디지털아카이브

관련논문 및 자료

  • 명동성당 석조성물 및 기초석의 재질분석과 훼손도 평가: RISS-CC-BY-NC-ND

관련영상

  • tbs시민의방송

  • 명동성당채널

인천 답동성당

공공누리 제1유형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 정보 사적287호 인천 답동성당 (1981.09.25. 지정)
시대 일제강점기
소유자 및 관리자 (재)인천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소재지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50번길 2 (답동)
홈페이지 답동 성바오로성당 http://www.dapdo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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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신부 홍요셉이 세운 벽돌 구조의 성당으로 1897년에 처음 건립되었다. 1937년 두차례에 걸친 내부공사가 있었지만, 비교적 옛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당의 평면은 십자형이며,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하였으나 중요한 곳에는 화강석재를 의장적으로 사용하였다. 정면의 중앙과 양 옆으로 출입구가 나있고, 가운데 출입구 위로 장미꽃 모양의 창을 설치했다. 건물 중앙에 큰 탑을 두고 경사진 지붕을 날개로 단 다음, 끝부분에 장식적인 작은 탑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20세기 초에 지어진 우리나라 교회건물의 보편적 형식이다.


특징

답동플리커.jpg
플리커

  • 건축미의 절정 3개의 종탑

성당의 기본 형태는 십자가형 바실리카로 3개의 정문이 있는 중앙 파사드가 위치한 서쪽에서 제단 방향인 동쪽으로 향한다. 성당 내부는 아치가 있는 기둥 열에 의해 중랑과 두 개의 측랑으로 나뉘고, 서쪽 파사드의 3개의 문은 각각 성당 공간 내부의 구획을 반영한다. 즉 중앙 정문은 높은 중랑이, 중앙 정문보다 크기가 작은 두 개의 정문은 좌우 측랑들 앞에 대체로 자리한다. 또한 성당 파사드는 3개의 종탑에 의해 강조되고, 중앙정문 윗부분에는 장미 창이 있다.

답동성당의 파사드의 3개의 종탑은 성당의 건축미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장식이다. 중앙 종탑과 좌우의 작은 종탑은 8개의 작은 돌기둥으로 종 끄트머리가 양파 모양을 한 8각형의 돔을 떠받들고 있다.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은 8각형의 중앙 종탑은 웅장미와 안정미를 드러낸다. 그리고 성당의 경사진 지붕의 양끝에는 각각 작은 8각형의 탑이 우뚝솟은 중앙 종탑과 균형미를 이룬다. 또한 돌과 벽돌을 섞어 지은 답동성당의 주된 재료는 적벽돌을 썼지만 건축미를 살리기 위해 중요한 곳에는 화강석을 사용했다. 벽감 모양의 아치 형태의 성당 출입구와 성당을 빙 둘러싸고 있는 반원형 아치 형태의 창문들, 그리고 처마 밑 돌림띠는 화강석을 사용했다. 이로써 성당의 파사드는 적벽돌과 화강석이 어우러져 중후하면서도 화려함을 자아낸다. 비록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매일 낮 12시와 저녁 6시에 울리던 3개의 종은 현재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탑의 조형미와 상징성은 여전하다.

숫자‘8’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고 생각되었기에 종탑을 8각형태로 만들어 로마네스크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또 다른 사항은 동서의 축선에 따른 성당의 공간배치이다. 왜 성당의 제단 부분을 동쪽에 두었는가? 그 이유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알 수 있다.“동쪽 하늘로부터 오신 하느님의 존엄함을 숭배하기 위해 머리를 돌려야 하고, 지상의 낙원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되돌아가야 하며, 예언자 즈가리아는 그리스도를 지상의 빛이라고 하면서 동방이라 불렀고, 히브리의 예언자 다니엘은 그리스도가 동방에서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하고, 마태오는 복음서에서 마지막 끝날에 그리스도는 동쪽에서 오실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제단 부분은 성당 제의의 중심점이기 때문에 성당건축은 언제나 제단부분부터 시작되었다. 중세 사람들이 성당을 지상에서 예시하고 있는‘천상의 예루살렘’이며, 신자들이 종교적인 깨우침을 찾는 곳과 천상의 신비함이 도래한 곳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신자들은 성당에서 지상의 삶으로부터 초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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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BY-NC-ND BY김우영 공유마당

  • 빛의 공간미-스테인드글라스(유리화)

답동성당의 내부에 들어서면 화려한 색채의 창문 유리가 우리를 압도한다. 유리화는 1979년 본당 설정 9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제단 뒷부분과 성당 내부 좌우 창문에 제작되었다. 유리화는 기하학적이면서 추상적인 형태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각각의 장식 모양(15점의 장미 문양, 제단 뒷부분)과 성경주제(8점의 구약의 창세기와 8점의 신약의 그리스도 이야기, 좌우 창문)가 그려져 있다. 화려한 유리창은 고딕양식 성당 건축에서 절대적인 새로움이다. 유리창을 통한 ‘빛의 신비주의’는 성당 내부 전체 공간에 작용한다. 다채로운 유리창은 성당의 고귀한 요소일 뿐 아니라, 안으로 비쳐드는 빛을 통하여 성당은 천국에 가까운 이상적 모델, 즉‘천상의 예루살렘’으로서의 상징적 기능을 가진다. 중세 사람들은 빛은 신의 원천이라 생각했다.

빛의 신비는 이미 내부로 들어오기 전 성당 입구위에 장미창이라고 불리는 태양을 닮은 원형창에서 출발한다. 이 장미창에서 태양은 그리스도를, 장미는 성모마리아를 상징하기 때문에 성당 내부의 유리창과는 달리 빛의 근원으로 나타난다. 장미창은 거대한 태양처럼 빛나면서 외부의 빛을 변화시켜 성당 내부로 끌어들인다. 이와 더불어 성당 내부의 유리창들은 빛의 벽으로 변화되어 빛으로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운다. 그 빛은 육중한 돌로 구성된 모든 구조물의 구석구석에 닿아 단단한 물질을 마치 하늘거리는 레이스 천과 같이 시각적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빛은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도 비춰준다. 또한, 유리창은 대단히 장식적인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그려진 그림의 내용으로 신자들을 교육하는 것에도 목적이 있다.

그래서 중세 신학에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거룩한 교사로 비유되었다. 이를 통해 신자들은 ‘영원한 진실의 태양’과 만난 것이다. 이렇게 성당의 내부공간은 심오하게 작열하는 색채의 감동과 빛을 전달하면서 신자들을 다른 세계로 옮겨준다. 마찬가지로 초창기 한국 교회 건축인 답동성당도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의 구조적 미학을 조화롭게 보여주면서 종교적인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글.윤인복 (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사진.답동 성바오로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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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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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성당

쾰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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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쾰른 대성당(독일어: Kölner Dom, 정식 명칭: Hohe Domkirche St. Peter)은 독일 쾰른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이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쾰른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라 쾰른 주교좌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쾰른 대교구의 교구장은 라이너 마리아 뵐키 추기경이다. 이 성당은 독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건축물이며,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쾰른 대성당을 일컬어 “인류의 창조적 재능을 보여주는 드문 작품”이라고 묘사하였다. 매일 2만여 명의 관광객이 이 성당을 찾는다.

쾰른 대성당은 높이 157.38미터로,울름 대성당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는 세 번째로 높은 로마네스크·고딕 양식 성당이다. 신성 로마 제국 시절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가져온 동방 박사 3인의 유골함을 안치하기 위한 건축물로서 1248년부터 짓기 시작했다. 대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었지만, 오랜 건축 기간을 거쳐 결국 1880년에 네오 고딕 양식으로 완공되었다. 완공 이후 1884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라인 강변 언덕 위에 지어졌으며, 대성당 주변에는 쾰른 중앙역과 호엔촐레른 철교, 루트비히 박물관, 로마 게르만 박물관 등이 있다.

출처-위키백과

구조물

외부구조물

  • 서쪽 현관

쾰른 대성당의 주 현관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현관의 오른쪽 ‘베드로 현관’은 1370년에서 1380년 사이에 지어진 중세시대부터 사용된 원래의 현관이다. 현관의 양옆에 있는 석상 중 왼쪽의 3개와 오른쪽의 2개만이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형상이다. 19세기에 제작된 석상과 중세시대에 제작된 석상은 색상뿐만 아니라 질도 명확히 차이가 난다. 왼쪽 현관은 ‘동방 박사 현관’으로 1872년에서 1880년 사이에 건설되었다.중앙 현관은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다.

  • 남쪽 현관

왼쪽 현관부터 오른쪽 현관까지 각각 ‘우르술라 현관',‘수난의 현관’,‘게레온 현관’이라 불린다. 석상들은 1847년 루트비히 슈반탈러이 제작했다. 이 석상들은 독일 최고 로마네스크-나사렛 종교 예술 양식으로 평가받는다. 남쪽 정면은 네오 고딕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에발트 마타레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우르술라와 게레온은 쾰른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성녀와 성인이며 각각 쾰른에 있는 성당들의 명칭이기도 하다.

  • 북쪽 현관

왼쪽 현관부터 오른쪽 현관까지 각각 ‘보니파티우스 현관', 미하엘 현관’, 마터누스 현관’이라 불린다. 북쪽 전면부의 모습은 초대 교황인 베드로의 서제 사품 인도식으로 시작되는 쾰른 대성당의 역사와 관련되어 설계되었다. 마터누스 현관은 쾰른의 대주교 관할구의 기원을 재현하였다. 마터누스는 쾰른 최초의 신학생이자 최초의 주교가 된 사람으로, "쾰른 주교좌에 앉은 사도의 가르침"으로 비유되었다. 그러한 연유로 현관의 이름은 마터누스로 명명되었다.

  • 교차랑 탑

제2차 세계 대전의 폭격으로 교차랑 상부에 있던 원레의 네오 고딕 양식의 탑은 파괴되어,1959년부터 1962년 사이에 아르 데코 양식으로 재건됐다. 탑 꼭대기에는 다른 성당들이 보통 달고 있는 십자가 대신 별 모양의 장식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 속 동방 박사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베들레헴의 별을 상징한다.

출처-위키백과

내부구조물

  • 신랑

쾰른 대성당의 신랑은 144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긴 회랑 중 하나이다. 바닥부터 천장까지의 높이는 43.35미터로, 보베 대성당(48.5m)과 밀라노 대성당(46.8m), 팔마 데 마요르카에 있는 라 세우(43.74m)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높다.

  • 제실

쾰른 대성당에는 7개의 방사형 제실(경당)과 2개의 일반 제실, 1개의 독립 제실이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시계방향) 십자가 제실(일반 제실): 970년경에 제작된 게로 십자가가 있고 그 뒤로는 성체 제실(독립 제실)이 있다. 엥엘베르투스 제실: 게오르그 제단과 대주교 안른 폰 샤우엔부르크의 묘비가 있다. 마터누스 제실: 16세기 제작된 동방 박사 목판과 대주교 필리프 폰 하인스베르크의 묘비가 있다. 요한네스 제실: 1320년 제작된 십자가형 제단과 만성절, 야곱, 마리아 스테인드글라스, 대주교 콘라트 폰 호흐슈타덴의 묘비가 있다. 삼 왕(동방 박사) 제실: 1260년 제작된 성서 창유리, 1330년경에 완성된 삼 왕, 베드로-마테르누스 창유리가 있다. 아네스 제실: 1100년 제작된 대주교 이르밍가르디스 폰 쥐히텔른의 석관과 1320년 제작된 창유리가 설치 되어있다. 미하엘 제실: 대주교 발라름 폰 윌리히의 묘비와 1820년경에 제작된 토마스, 요하네스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어 있다. 스테파노 제실: 대주교 게로의 묘비와 1280년경 제작된 새 성서 창유리가 있다. 마리아 제실(일반 제실): 원래 성모상이 있던 제실로 현재는 1442년경 제작된 스테판 로흐너의 동방 박사 제단이 있다.

  • 창문

성당에서 특히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바로 성당을 가득 채운 스테인드글라스이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성당의 남쪽 측랑에 설치되어 있는 5개의 채색 창으로 이루어진 바이에른 창이라 불리는 창문이다. 1842년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1세가 기증한 창문으로 1848년 창틀에 삽입되었다. 성 요한 세례자와 카를 대제, 네 명의 복음 사가 등이 묘사되어 있다.[6] 바이에른 창의 맞은편에는 1507년에서 1509년 사이에 기증되어 설치된 다섯 개의 창에는 쾰른 기사 성인들과 베드로의 성인담, 수난 장면, 성모 마리아 등이 그려져 있다.[6] 2007년 8월 25일 봉헌된 게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인 리히터 창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 파괴된 기존 스테인드글라스를 대신하여 익랑의 남쪽 창문에 설치된 것으로, 그 색상과 거대한 규모로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창이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현대 미술 작품으로 11,263개의 색상이 입힌 균일한 유리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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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 유산보존을 위한 지상파 레이저스캐닝:쾰른 대성당 문서화 프로젝트: ISPRS Annals via DOAJ

작성자 및 라이선스

위 문서 성당정미영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CC-BY 에 따라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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