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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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지명유래

성북구

성북구 城北區 Seongbuk-gu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구이다. 현재 20개 행정동과 39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관내에 정릉(貞陵)·의릉(懿陵)·서울성곽 등의 문화재가소재한다. 성북구라는 이름은 지역이 도성의 북쪽에 위치한 데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인창방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숭신방·인창방은 성밖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장위리계(長位里契)·안암동계(安岩洞契) 등 현재 성북구에 소재한 동과 관련된 지명이 언급되어 있다. 「한성부지도」에는 흥인지문의 동쪽 밖으로 숭신방·인창방이 표현되어 있고 안암동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1914년 숭신방과 인창방에서 성저에 가까운 일부 지역만을 창신동·숭인동으로 개칭하여 경성부에 포함시키고, 대개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하여 숭인면으로 개편되었다. 1936년경기도 고양군의 숭인면·한지면 등이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동부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43년 구제의 실시에 따라 동부출장소 관할 지역을 나누어 동대문구와 성동구를 설치하였다. 1949년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를 분리·신설하였다.

행정구역

길음동

길음동 吉音洞 Gireum-dong [異] 기리묵골, 기레미골, 기리미골, 지리미골 구의 북쪽에 위치한 동이다. 길음동은 법정동명이며, 길음1동과 길음2동의 2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이 골짜기가 길게 놓여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기리묵골’또는‘기레미골’로 불렀는데, 그것이 한자화하여 길음동이 되었다. 또 비가 많이 오면 이 일대가 물이 많이 차고 길이 질다고 하여‘기리미골’또는‘지리미골’로 불리었다고도 한다. 이를 한자로 옮긴 것이 길음동(吉音洞)이다. 한편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좋은 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으로 이름이붙여졌다고도한다. 조선시대한성부동부숭신방(崇信坊) 미아리계(彌阿里契)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숭신면 미아리가 되었다가, 1914년 숭신면의 미아리와 불당동(佛堂洞)을 병합하여 경기도 고양군숭인면(崇仁面) 미아리가되었다. 1949년성북구에 편입되어 1950년 미아동이라 하였다.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신설되면서 도봉구 관할이 되었다. 1975년 도봉구 미아동 일부가 다시 성북구로 편입되어 길음동이라고하였다.

돈암동

돈암동 敦岩洞 Donam-dong 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이다. 돈암동은 법정동명이며, 돈암1동·돈암2동의 2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崇信坊)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동 이름은 미아리고개를 예전에 되너미고개라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되너미고개란 병자호란에 되놈이이고개를 넘어 침입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되너미고개를 적유령(狄踰嶺)·적유현(狄踰峴)·호유현(胡踰峴) 등으로도 불렀다. 되너미고개를 한자화한 것이 돈암현(敦岩峴)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도성대지도』, 『경조오부도』등에는 적유현으로 되어 있고, 『여지대전도』의「도성도」, 「사산금표도」등에는 호유현으로 나타난다. 1914년 숭신면의 삼선평과 돈암리를병합하여경기도고양군숭인면돈암리가되었다.일제강점기에 제작된『조선지형도』에 돈암리가 보인다.1936년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돈암정(敦岩町)이라 하였다. 1943년 구제의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 관할이 되었다. 1949년 성북구를 설치함에 따라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돈암동일부를분리하여삼선동과동선동으로 하였다. 1963년 돈암동 일부를 분리하여 동소문동으로 하였다.

동선동

東仙洞 Dongseon-dong 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선동1~5가·동소문동6~7가의 7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동 이름은 인접한 동소문과 삼선동 에서 한 글자씩 가져온 것이다. 동소문은 서울성곽 4소문중의 하나인 혜화문의 속칭이다. 삼선동은 혜화문 밖의 삼선평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한성부동부숭신방(崇信坊)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숭신면 삼선평(三仙平)이었다가, 1914년 숭신면의 삼선평과 돈암리(敦岩里)를 병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 돈암리가 되었다. 1936년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돈암정이라 하였다. 1943년 구제의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 관할이 되었다. 1946년 일본식 행정지명을 우리말로 변경시킴에 따라 돈암동이 되었다. 1949년 성북구를 설치함에 따라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돈암동 일부를 분리하여 삼선동과 동선동으로 하였다.

보문동

普門洞 Bomun-dong 구의 남쪽에 위치한 동이다. 보문동1~7가의 7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동 이름은 보문사(普門寺)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동부숭신방신설계(新說契)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 숭신면 신설계가 되었다가, 1914년 숭신면의 신설계·탑동·우선리·신리·안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신설리가 되었다. 1936년 다시 경성부 일대 에 편입되어 신설정이라 하였다. 1943년 구제의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 관할이 되었다. 1946년 일본식 행정지명 을 우리말로 변경시킴에 따라 신설동이 되었다. 다시 신 설동의 일부지역을 분할하여 보문동으로 하였다. 오늘날 지하철 6호선 보문역 등에서 관련 지명을 엿볼 수 있다.

삼선동

三仙洞 Samseon-dong 구의 서남쪽에 위치한 동이다. 삼선동1~5가, 동소문동2~5가의 8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동 이름은 혜화문 밖의 삼선평(三仙平)에서 유래하였다. 삼선평이란 옥녀가 하늘에서 내려 온 세 신선과 함께 동 남쪽에 있는 옥녀봉에서 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지명에 선(仙)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화랑들이 심신을 단련하던 곳으로추측해 볼 수도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崇信坊)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숭신면 삼선평이 되었다가, 1914년 숭신면의 삼선평과 돈암리를 병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조선지형도』에 삼선평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1936년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돈암정이라 하였다. 1943년 구제의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 관할이 되었다. 1946년 일본식 행정지명을 우리말로 변경시킴에 따라 돈암동이 되었다. 1949년 성북구를 설치함에 따라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돈암동 일부를 분리하여 삼선동과 동선동으로하였다.

석관동

石串洞 Seokgwan-dong [異] 돌곶이 마을 구의 동쪽에 위치한 동이다. 행정동명과 법정동이 일치한다. 동 이름은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天藏山)의 지맥이 검정돌을 꼬지에 꿰어놓은 것 같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조선 경종의 능인 의릉(懿陵)이 이곳에 들어온 뒤부터는 돌곶이 능말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옮긴 것이 석관동이다. 『조선왕조실록』에“현종 2년(1661)에 건원릉(健元陵)·현릉(顯陵)·목릉(穆陵)을 배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석관(石串)에 이르러 금군(禁軍)의 활솜씨를 시험하였다.”는 기록에서 석관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광여도』, 『사산금표도』에는 석곶현(石串峴)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해동지도』, 『1872지방지도』에 의릉이 표기되어 있어서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인창면 석관리(石串里)가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 석관리가 되었다. 1949년 성북구로 편입되어 1950년 석관동 이라고 하였다.

성북동

城北洞 Seongbuk-dong [異] 북저동(北渚洞), 도화동(桃花洞), 북사동(北寺洞), 묵사동(墨寺洞) 구의 서쪽에 위치한 동이다. 성북동·성북동1가·동소문동1가·동소문동4가의 4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관내에 서울 성곽이있다. 성북동이라는 지명은 도성의 북쪽에 위치한 데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 어영청의 성북둔(城北屯)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북동을 북저동(北渚洞)으로 칭하고 있다. “혜화문 밖 북쪽에 있는데, 동 가운데 복숭아나무를벌여 심어서 (중략) 민간에서는 도화동(桃花洞)이라 부르며, 어영청의 성북둔이 있다. 북사동(北寺洞)이라고도 하며, 옛날에 묵사가 있었기 때문에 묵사동(墨寺洞)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조오부도』에 는 성북동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崇信坊)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이되었다가, 1914년경기도고양군숭인면(崇仁面) 성북리가 되었다. 1936년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성북정이라 하였다. 1943년 구제의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 관할 이되었다. 1949년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를 분리·신설하면서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안암동

安岩洞 Anam-dong 구의 남쪽에 위치한『광여도(양주목)』의 석관동(석곶현) 일대 동이다. 안암동1~5가의 5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이 곳에 편히 앉아 쉴만한 큰 바위가 있어서 그것을 앉일바위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한자화하여 안암동(安岩洞)이되었다. 안암천도 여기서 유래하였다. 『여지대전도』의「도성도」, 「도성삼군문분계지도」, 「한경전도」, 「경조오부도」, 「한성부지도」등에 안암동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 안암동계였다. 1911년 경성부 숭신면안암상리·안암중리 등의 지역이었다. 1914년 숭신면의 안암리·부석동(剖石洞)·궁리(宮里)·원리(園里)를 병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가 되었다. 1936년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안암정이라 하였다. 1943년구제의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 관할이 되었다. 1949년 성북구를 설치함에 따라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월곡동

月谷洞 Wolgok-dong 구의 동북쪽 위치한 동이다. 월곡1동과 월곡2동의 2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월곡동과 하월곡동의 2개 법정동을 관할한다.동 이름은 이 곳에 있는 천장산이 반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 중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역을 웃다릿골, 아래 지역을 아랫다릿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조선후기 이곳에 주막이 밀집하여 있었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소장수들이 달밤에 이곳에 도착하여 숙박을 하고 잔월(殘月) 아침에 흥정했기 때문에 월곡이라 불렀다고도 전한다.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한성부 동부 인창방 미아리계 다릿굴 또는 교곡(橋谷)으로 나타난다. 『육전조례』에 따르면, 한성부 동부숭신방 월곡리계(月谷里契)였다. 갑오개혁 때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仁昌坊)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월곡상리·월곡하리가 되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가 되었다. 1949년 동대문구에서 성북구가 분리·신설되어 성북구에 편입되었다. 이때 상월곡리·하월곡리로 분리되었고, 1950년 상월곡동·하월곡동이라고 하였다.

장위동

長位洞 Jangwi-dong 구의 동북쪽에 위치한 동이다. 장위1~3동의 3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명은 고려 때 명신이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도 하고, 마을 뒤 장위산(獐位山)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장위리계(長位里契)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 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한성부 동부인창방 지역으로 장위리계가 언급되어 있다. 『여지대전도』의「도성도」에 장위, 「도성삼군문분계지도」, 「한경전도」에도 장위리가 표현되어 있다. 1911년 경성부 인창면 장위리가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 1949년 동대문구에서 성북구가 분리·신설되면서 성북구로 편입 되었고, 1950년 장위동이라고 하였다.

정릉동

貞陵洞 Jeongneung-dong [異] 살한이, 사을한리(沙乙閑里), 사아리(沙阿里) 구의 서북쪽에 위치한 동이다. 정릉동은 법정동명이며, 정릉1~4동의 4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 이름은 조선시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貞陵)이 있는 데서 유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태종 9년에 양주로 옮겨 모셨는데, 지금도 이곳을 정릉동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해동지도』, 『광여도』, 『1872지방지도』에는 도성 밖 에 정릉이 표기되어 있다. 정릉 이전의 지명은‘살한이’였는데, 그것을 한자화한 사을한리(沙乙閑里)·사아리(沙阿里)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1409년(태종 9) 정릉을 도성 밖의 사을한산으로 천장하였다.”는 관련 기록이 있다. 「한성부지도」에도 사아리가 표기되어 있다. 1914년 경성부 숭신면의 대정릉동·소정릉동·손가정(孫哥亭)·청수동(淸水洞)을 병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가되었다. 1936년 일부 지역이 돈암리에 다시경성부에편입되었다. 1949년 남은 지역이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고 1950년 정릉동이 되었다.


종암동

종암동 鍾岩洞 Jongam-dong 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이다. 법정동과 행정동명이 일치한다. 동 이름은 이 곳에 종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 유래하였다고 한 다. 조선시대 한성부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호구총수』에 한성부 동부 숭신방 종암리계(鍾巖里契)로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양주목 지도」, 『광여도』「양주목 지도」에는 종암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조선지형도』에는 대종암·소종암·종암리(鐘岩里)가 있다.1911년 경성부 숭신면 대종암·소종암이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종암리가 되었다. 1936년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종암정이라 하였다. 1943년 구제의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 관할이 되었다. 1946년 일본식 행정지명을 우리말로 변경시킴에 따라 종암동이 되었다. 1949년 성북구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