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생애와 해주고 싶은 조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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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아버지의 모습

소개

아버지의 인생을 기록하고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남겨 직접 경험하지 못한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고 미래 세대에 줄 수 있는 조언들을 담아 아카이빙 하려고 한다.

아버지 본인의 소개

저는 1959년 12월 7일에 태어나 현재 63세인 박정희입니다. 1980년 전북대학교에 입학하여 1985년 12월 15일에 기아산업에 입사하여 회사생활을 시작하여 과장으로 퇴사한 후 외국인 회사에서 동종의 업무를 수행하며 기술담당 이사로 은퇴한 후 현재 음식에 관한 자영업을 고려하여 Recipe를 개발 중이며, 향후 자영업을 하며 프랜차이즈를 목표로 자료를 연구 &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삶

왼쪽부터 큰아버지, 고모, 아버지

출생 및 가족관계, 가정교육

아버지는 1959년 12월 7일,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3남매 중 차남으로 형인 큰아버지와 동생인 고모가 있고 세 남매는 매우 사이 좋은 관계였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직업군인이셔서 아버지는 자주 옮겨 생활할 수밖에 없었고 유년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장교 출신이어서 가부장적이고 사람에게 엄격하셨고, 보수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아버지는 부모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거역할 수 없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예의 바르고 어른을 공경하는 태도를 갖추게 되고 어른들의 시선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가난과 여러 번의 이사생활

아버지의 성장기 때 대부분의 환경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 공통이자 일상이었다. 미국에서 공급해준 밀가루로 만든 빵을 국가가 배급해주는 환경에서 굶주림을 해소할 수있었다. “모든 국민이 가난이란 굴레에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하루 세 끼를 먹는 것이 하나의 바램과 희망이었기에 가난이란 것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말씀해주셨다.


할아버지가 직업군인인 관계로 아버지는 친구를 사귈 기회가 없었고 이사 간 곳에 적응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강원도, 경상도, 경기도 등을 오가다 할아버지가 전주로 전출된 이후, 전주 호성동의 초포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해성중학교와 완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등학생 시절 아버지의 모습

청소년기: 만연한 체벌, 군사교육, 억압받는 학생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추첨으로 중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는 시험을 합격해야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는 교사들의 체벌이 공공연하게 인정되는 시대였고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국가에 대한 군사교육을 받고 정식 교과과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기억나는 사건으로 1968년 ‘국민교육헌장’이 나와 그것을 암기하기 위해 매일 공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하셨다. 암기하지 못하면 집에 일찍 갈 수 없었고 실제로 외우지 못한 벌로 청소를 하셨다. 또한 미국에서 공급해주는 옥수수 빵까지 먹을 수가 없었기에 모든 학생들이 헌장을 열심히 암기할 수밖에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의 엄격하고 엄한 환경에서 많은 체벌이 이뤄지고 학생들에 대한 인격은 거의 무시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실제로 사회적으로도 이런 것들이 암묵적으로 인정되었던 사회라고 말씀해주셨다. 아버지는 그 당시 학교를 ‘선생님들의 권위와 존경심이 최고였었던 환경’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부모와 어른들에 대한 순종과 예의를 강요받는 환경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어떤 개성, 자질이 있느냐보다 대학입시의 결과에 모든 것을 매진하는 환경에서 교육받고 일종의 강요와 폭력이 인정되는 잘못된 교육환경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려웠다. 학생의 인격이 무시받고 개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아버지는 안타깝게 생각했다.


대학생 시절 아버지의 모습

대학 입학: 공대 입학, 시위와 계엄령, 취업을 위한 공부

당시 국가 정책이 공업화에 초점을 둔 결과, 공과대학의 확대가 정점을 찍고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이과 학생들은 공과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예비고사와 대학 본고사를 치루고, 사립 대학교와 국립 대학교의 학비 차이가 4~5배 차이가 있어서 아버지는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를 선택하셨고 전북대학교 공과대학의 금속 재료공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대학은 민주화에 대한 시위가 잦았고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조치로 대학을 폐쇄하고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전두환 군사정권의 정치화 등으로 대학 시위는 연일 이어졌고 아버지가 대학을 다녔을 당시 5.18 광주사태가 발생하였다. 학생, 시민의 민주화 요구와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군사정권의 억압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국가의 혼란스러움은 정점을 찍고 계엄령과 학교 휴교령이 내려졌다. 운좋게 아버지가 직접 어려움에 처한 상황은 없었고, 이 시기 부모님의 권유로 아버지는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대학 진학 후 취업에 대한 공부에 집중하였고 취업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공부가 아버지에겐 제일 중요한 관심사였고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어려움은 없었지만 지방에 없는 서적을 구비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하였다. 공부하고 취업하여 아버지 스스로 자립하여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아버지의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취미가 없었다고 한다.

취업생활: 자동차 회사, 2번의 퇴사, IMF

대학교 4학년 때, 아버지는 포스코(포항제철), LG, 대우, 기아산업(기아자동차)에 합격하였고 친분 있는 교수님과 상의한 결과, 기아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회사에 입사하고 자동차 도장을 하는 분야를 담당하게 되었고 관련 현장실습 공부를 하게 되었다. 당시 자동차산업 분야가 기초적인 단계였기 때문에 88년도 올림픽 때 자동차 생산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생산량을 더 확보하기 위해 생산기술분야에서 일을 하고, 아버지의 회사에서 도장공장을 5개나 건설하였다.


아버지는 과장으로 승진하고 기아자동차의 경영난이 악화되는 것을 보고 회사 퇴사를 결심하였다. 퇴사 후, 한국에서 동종의 업무를 하는 일본계 외국인 회사, 한국대기사에 부장으로 입사하였다. 재직기간 중 자동차 도장공장을 국내, 미국, 중국, 러시아, 리비아 등에 건설하였고 매출액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한국인 위탁경영체제에서 일본인의 직접관리체제로 변경되자 15년 동안 근무해 온 기술이사 CEO에서 다시 퇴사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하면서 기억나는 역사적 사건으로 1997년 한국에 닥친 IMF를 언급하였다. IMF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실직되고 부도처리로 많은 기업인과 노동자들이 고통받았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 힘들었고 노동자들의 값싼 인건비와 고용에 대한 불안감으로 고용주에 대한 신뢰성이 가장 많았던 때라고 하셨다. 자신의 주장보다는 지시에 따르는 것이 그 때의 경제상황이었고 IMF 시절 사업주에 대한 반대의견은 거의 없었다. 만약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그 때처럼 일을 한다면 아버지가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이 되었을거라고 하셨다.

출장 간 러시아에서 찍은 사진

여가생활과 연애관

아버지는 기술총괄 이사로 일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골프 회원권, 콘도 회원권 등이 있었지만 많은 업무로 인해 여가생활을 즐길 수 없었다. 즐기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일들을 한 것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다시 그런 환경이 온다면 삶의 질이 풍요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추천하고 싶다고.


대학 시절에는 공부, 자립, 취업만이 관심사였고 공부와 연애, 결혼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취업이 어려웠기 때문에 취업이 첫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연애나 결혼관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못했다.


덧붙이면서 아버지는 공부와 취업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셨다. 인간의 최대 목적은 행복인데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더라도 소설 등 미디어에서 간접적인 경험을 해야한다고 하셨다. 좋은 선배, 어른들로부터 연애, 결혼에 관한 진솔한 얘기를 듣는 것도 좋은 경험이고 많은 경험을 통해 자신의 마음가짐을 세우는 것을 강조하셨다.


가장이 된 아버지, 바람직한 부모/자녀관

결혼 후 자녀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에게 자식이란 정말로 사랑스럽고 분신과 같았다고 하셨다. 자녀를 위해 모든 부모가 해주는 것처럼 아버지 또한 본인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모든 것들, 주변에서 해주는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주고 싶을 정도로. 부모가 예측해서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보다 자식을 안내하고 지도하고 관찰하여 자식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게 진정한 부모의 행동이라 하셨다. 절대 음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의 마음대로 결정한 것이 아버지에게 가장 큰 후회라고 말씀하셨다.


형과 나의 사진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맺어준 기회라고 한다. 어릴 때는 부모의 뜻에 따라 성장하지만 청소년기에는 자신의 뜻을 주장하고 성인이 되면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이라 간주하고 간섭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셨다. 부모 또한 자식에 대한 마음과 의견을 자식 스스로 처리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한 발 떨어져서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지나친 간섭과 제재는 불신을 낳고 믿음을 손상시킨다. 부모에게는 자식, 가족이라는 큰 틀에서 서로가 존중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가장 큰 걱정, 앞으로의 미래와 조언

전반적으로 인구의 절벽시대를 맞고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렵다는 인식을 모든 사람들이 너무 빨리 느끼고 있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라고 하셨다. 젊은 층 뿐만이 아니라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이러한 시대를 예측하고 설계하는 나라의 관리가 있어야 되며 기업체에서는 고용과 관련하여 단순한 고용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인턴 등 사업주 입장에서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도 젊은 층이 직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제도와 개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을 후회하고 계신다. 하지만 후회할 일들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생활하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사람들과의 융화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에게 ‘즐거움’은 자신을 위한 삶을 위해 생활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셨다. 지금도 아버지는 관심있는 일에 집약하고 투자하고 싶다고 하셨다.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음식점 개업을 계획하는 중이시며, 지금도 음식 레시피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연습하고 계신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인생의 첫번째 목표는 나이를 신경쓰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을 때까지 계속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아버지가 사회에 처음 참여했을 때와 지금의 환경은 많은 차이가 있다. 좋게 말하자면, 노동 유연성이 많아졌다는 것인데 젊은 세대가 요구하고 갖고 싶은 직업은 적고 어렵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다니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사람은 재능과 조건에서 차이가 있다. 좋은 직장을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일하고 싶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큰 현명한 것이라고 하셨다.


콘텐츠를 마치며

아버지의 인생을 스토리텔링으로 적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역사적 사건들, 알 수 없는 많은 사진들, 인생을 살아오면서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것들.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부모님을 구술한다는 작업은 낯설면서도 친숙하면서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작성하는 이 콘텐츠가 유의미한 기록으로 남아, 나에게는 또 다른 영향을 미치는 자료로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의 이야기, 구술사는 활용하는 가치에 있어서 중요한 점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그 자료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이 프로젝트가 좋은 결과물로 남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