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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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삼선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29년 신간회 복대표회의에서 상무집행위원, 신간회 영덕지회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휘원회 경북책임자, 조선 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조직준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1934년 징역 2년을 받았다.
1939년 경성콤그룹에 참여하여, 1940년 성북동 또는 삼선동 자택에서 경성콤그룹의 기관지를 받아 읽었다. 1944년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이 결성되자, 노농군 편성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대문구 돈암정 522번지(현 삼선교로6 일대로 추정)에 거주하였다.

생애

1900년 경상북도 영덕에서 출생

1921년 8월 조선학생대회 순회강연단에 참여하여 고령·초계·합천 등지에서 강연하였음

1923년 1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영덕지방 순회강연회에서 ‘위험한 일보 앞의 운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학교 교사, 『시대일보』 영덕지국장, 『동아일보』 포항지국장 등을 거쳐 문필업·어업·광산업에 종사함.

1925년 2월 포항의 영일청년회가 주최한 기근 구제 음악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 12월 영덕청년연맹 결성대회에 출석하고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됨.

1928년 9월 야학 교과서를 편집한 것이 빌미가 되어 영덕경찰서에 검거된 후 10월 대구지법 경주지청에서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 6월을 선고.

1929년 신간회 영덕지회에 참여. 그 후 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됨. 9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음.

1930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경북 책임자가 되었고, 대구·포항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함.

1931년 3월 조선좌익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조직준비회에 참여함. 1933년 검거되어 1934년 3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음.

1939년 경성콤그룹에 참가함.

1944년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에 참여함.

1945년 3월 건국동맹 산하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노농군(勞農軍) 편성을 계획, 전국의 군사전략상 중요 지점에 책임자를 파견하여 조사활동을 함.
8월 서울에서 검거되었다가 해방 직후 석방, 그 후건국동맹 총무부를 맡아 활동함.

1945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선포 이후 전국인민위원회가 결성되자 중앙인민위원회 인민위원으로 선임, 보안부에서 활동하였다.

1945년 11월 조선인민당 중앙정치위원, 1946년 1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준비위원회 조직부에서 활동하였음. 2월 민전 중앙위원에 선임, 이후 사무국 재정부 차장, 재정부장을 역임.

1946년 8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 합당 과정에 참여하여 박헌영과 함께 부위원장에 선임됨

1947년 8월 ‘8·15폭동음모사건’으로 백남운(白南雲)·최원택(崔元澤)·장건상(張建相)·유영준(劉英俊) 등과 함께 미군정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구형받음.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제1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남조선 대표)으로 선출되면서 북한 정치계에서 활동함.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1953년 3월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 1953년 8월 조선노동당 당칙수정위원, 1955년 1월 도시경영상, 1956년 5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등을 역임
1957년 9월부터 신병으로 인해 모든 직위에서 물러남. 사망 이후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힘.

비고

출처: 성북아카이브[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