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서구 강화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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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

마니산 참성단

고려, 조선 양 왕조에 걸쳐 국가는 참성단에서 도교식 제전행사인 초제(醮祭)를 거행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강화도호부조에는 단군이 쌓은 제단이라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 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예컨대 18세기 중엽의 국학자 이종휘는 참성단을 단군 시대의 종교인 신교의 제단으로 이해하고 참성단의 제사가 도교적 성신신앙과는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며 그때까지 써오던 참성단(塹星壇)을 참성단(塹城壇)으로 바꿔 썼다.

참성단의 제단은 한민족만이 갖는 고유한 형태로 자연석들에 의지하여 둥글게 쌓은 하원단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방단의 이중 구조로 구성되었는데 이러한 원방형 제단이 중국 요하 지역의 홍산문명 유적에서도 발견돼 유사성과 함께 문화의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강화의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이기 때문이며, 강화도의 고유 지명인 마이(摩利) · 혈구(穴口) 등은 하늘과 인연이 깊다고 전해온다. 또 단군 개국신화(開國神話)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환웅의 권속이므로 단군이 참성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지낸 뜻을 짐작케 한다.

한말 일제강점기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가 성립한 이후 강화도는 단군시대 정치중심지의 하나로 인식되고, 참성단의 네모난 상단과 둥근 하단은 각각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마니산은 음(땅)과 양(하늘)이 만나는 신성한 수중산(水中山)으로 이해되었고, 마니산 기슭에 단군사당이 건립되었다. 참성단을 민족성지로 서술한 기록으로는 김교헌(金敎獻)의 《신단실기》(神檀實記), 북애자(北崖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 대야발(大野勃)의 《단기고사》(檀奇古史), 그리고 《대종교중광육십년사》(大倧敎重光六十年史) 등이 있으나, 해당 저술들은 역사 기록으로써는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8·15 광복 후 대종교의 영향을 받아 개천절이 제정되면서 이에 따라 참성단도 민족의 성지로 이해하는 전통이 그대로 이어졌다.

(출처 : 위키피디아, CC BY-NC-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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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작자 : MountainTV, CC BY>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fYyqRu1u5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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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42-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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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고려궁지

이곳은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이 있던 곳이다.

1232년 6월,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년)에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 든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에 도읍을 옮겼으며, 1234년 궁궐과 관아를 완공하였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 이궁, 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몽골과의 강화(講和)가 성립되어 개성(開城)으로 환도(還都)한 뒤 궁궐과 성곽은 무너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 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버렸다.

지금은 강화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 있고 일부는 복원되어 궁궐 터를 지키던 아름다운 고목들과 함께 고려궁지 또는 고려궁터로 불리고 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CC BY-NC-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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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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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화 덕진진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현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출처 : 위키피디아 CC BY-NC-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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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37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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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대한성공회강화성당

1896년(고종 33년)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1900년 11월 15일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찰스 존 코르페(Bishop Charles John Corfe, 한국이름 고요한)가 건립하였다. 대한성공회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며, 현존하는 한옥 교회 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한 한국인으로서는 1915년 첫 성공회 사제가 된 김희준 신부를 배출하였으며, 당시 한글로 기록된 사제 서품장은 예배당 내에 보존되어있다.

교회의 내부는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외관은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강화읍 성당은 입구 계단, 외삼문과 내삼문, 성당 건물, 사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삼문은 솟을대문에 팔작지붕으로, 현판에는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이라는 글이 한문으로 쓰여져 있다. 동쪽에 초대 사제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팔작지붕으로,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여 감사성찬례때 사용하는 종이 걸려있다. 성당의 현판에는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는 글이 한문으로 써져있고 팔작지붕과 돌로 되어 있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그 내외부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전형적인 한옥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으로, 내부공간은 교회기능에 충실하도록 연출하였다. 초기 성공회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는 성당건물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CC BY-NC-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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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 22 (관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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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C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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