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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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27년 장한사에서 경성의 권번 기생들이 대사회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기 위하여 창간한 대중잡지.

서지사항

창간호는 1927년 1월 10일 날짜로 발간되었고, 장한사가 발행했다. 창간호의 전체 면수는 125쪽으로, 광고 등을 제외하고 본문은 111쪽이다. 2호는 108쪽으로 발행되었다.

특징

『장한』은 기생 신세의 한탄부터 기생제도의 철폐, 사회비판에 대한 의견, 의학상식, 기생이 갖추어야 할 소양에 대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기생의 예술적 소양을 높이기 위해 시조, 소설, 중국 고전, 이태리 가극도 실었다. 문화의 향상과 풍속의 개선을 위해 기여하자는 의견도 있고, 사회변혁을 위해 계급 모순과 차별 타파를 결의하는 내용도 있다. 1호에는 총 48개의 글이 실렸는데, 기생의 글이 26편이다. 이중 17편이 논설류이고, 나머지는 수필, 수기, 문예물, 동화이다. 외부 필진의 논설류와 야화, 콩트, 촌평, 가십, 정보기사 등도 실렸다. 2호에는 총 40편 중에 기생의 글이 26편이고, 이중 논설류가 11편이다. 나머지는 외부 필진의 논설, 시사평, 수필, 우화, 야담, 꽁트, 정보기사, 영화소설, 번역시들이다. 2호는 1호의 선언적 발언에 비해 일상 속으로 천착한 글들이 많고, 교양과 오락물이 좀 더 강화되었다.

『장한(長恨)』, 말 그대로 ‘오래도록 잊지 못할 원한’이라는 뜻이다.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낸 오래 한(恨)에 찌든 기생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재연되는 듯하다. 『장한』의 표지에 나타난 여인은 프레임의 한쪽에 치우쳐 있다. 이 여인은 심리적으로 자신을 보호할 때 나타나는 웅크린 자세로 앉아있으며, 한 손을 턱에 괴고 물끄러미 응시하며 앉아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그 여인은 새장 속에 갇혀있기까지 하다.

잡지의 표지 그림이 흥미로운데, 1호에는 ‘동무여 생각하라 조롱 속에 이 몸을’라는 문구와 함께 새장 속에 기생이 들어있는 그림이 그려있다. 천민 신분으로 기생에 대한 연민을 유도하였다. 즉 이 표지는 『장한』의 작자가 곧 기생들 자신이며 『장한』의 제일 첫 번째 독자도 역시 기생들이 될 것을 예견하여 그들의 한(恨)과 의식 촉구 의지를 효과적으로 담아내었다. 그러나 2호의 표지그림은 한복을 입은 기생과 양장에 단발을 한 여성이 손을 맞잡고 있고, 배경에 해가 떠오르고 있다. 기생들은 더 이상 음지에서 한탄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을 당당하게 펼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내용

박녹주(朴綠珠) - 〈장한(長恨)에 대하여〉

“······ 우리네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자면 조직적으로 단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필요를 느낀 까닭으로 우리 기생사회를 망라한 잡지가 비로소 고고의 소리를 외치게 되었습니다. 이 잡지야말로 우리의 생활과 의사와 설움과 기쁨을 거침없이 발표하는 마우스피스(Mouthpiece)입니다. 우리의 사회적 환경은 너무도 처참합니다.〈중략〉
우리도 사람입니다. 눈물도 있고 피도 있고 감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회적으로 똑같은 고락을 받겠다는 희망을 굳게 가지고 단결해야 하겠습니다. 이 의미 깊은 잡지 장한아! 우리의 살길을 열어줄 장한아! 나는 이 장한에 대하여 무한한 경의를 표하며, 우리를 위하여 열심과 노력을 다해 주기를 비는 바입니다.”

백홍황(白紅黃) - 〈파란중첩한 나의 전반생〉

“참 나의 밟아온 반 60의 짧고도 긴 인생의 험한 길을 더듬어 본다면, 모든 것이 눈물이요 허무한 꿈이로소이다. 저의 집은 본시 경상도 대구였습니다. 아버지는 거기서 어지간히 큰 드팀전(편집자 주 : 필로 된 무명 비단을 파는 가게)을 하셔서 저의 집은 남부럽지 않게 여유있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제 나이 열두살이 될 때까지 귀한 집의 무남독녀로 따뜻한 사랑 속에서 자랐습니다. ······ 그러는 동안에는 장사에 실패하게 되어 시커먼 불행의 그림자는 저의 집을 싸고 돌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저녁이었습니다. 두루마기 위에 눈을 가득히 맞으시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곧장 안방으로 들어오시더니만 방바닥을 두드리면서 대성통곡하셨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울어진 가산을 회복하려고, 이번에는 어떤 투기사업을 했던 것이 그만 실패했다는 것이었습니다.〈중략〉
그럭저럭 몇해가 지나고 늙은 아버지에게 아무런 수도 없으시고, 누구를 바라보고 살아갈까를 생각하는데, ‘아들도 없고 저 딸 하나뿐이니 별 수 있소, 기생으로라도 넣어서 저 애를 의지해서 살아야지 ······’ 하고 우리를 동정해 주는 어느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할 적마다 어머니는 그것이 될 말이냐고 펄쩍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제 힘으로 어머니 아버지가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기생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리하여 어머니를 조르기를 한동안, 십벌지목(十伐之木)이 없다고, 어머니는 ‘그것도 네 팔자니 어찌겠느냐’ 하시며 저를 기생권번에 넣어주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 열일곱이었습니다.〈중략〉
당시 대구에서 상당한 재산가로 거진 60이 가까운 늙은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대머리였습니다. 어느 연회 석상에서 한번 만난 뒤부터 그는 무슨 욕심을 채우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그때까지 사내라는 것을 잘 모르던 저는 무섭고 겁이 나서 몸을 피했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있으려니까 요리집에서 인력거가 왔습니다. 그래서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고 인력거에 몸을 실었습니다. 인력거꾼은 신이 나서 달렸습니다. 문을 살며시 열고 어느 손님이 나를 불렀나 하고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대머리였습니다.〈중략〉얼마 후에 눈을 떠보니까 뜻하지 않은 이부자리 속에 내가 있고, 정신을 차려 보니까 옆에는 그 대머리가 코를 골고 있지 않겠습니까. ······”

조동흠(趙東欽) - <무선전화(無線電話)>

“아담한 맵시와 천진난만한 애교로써 장안의 인기를 한몸에 모은 조선권번의 석정희(石貞姬)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신극운동단체인 토월회(土月會)에 들어가, 석금성(石金星)이란 이름으로 배우가 되었다. 〈간난이의 설음〉·〈스잔나〉·〈카추사〉등에 출연하여 많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내더니, 작년 7월 이후에 소식이 묘연해졌다. 그래서 각처로 무선전화를 놓아봤더니, 충남 어느 지방에서 아이까지 낳은 그의 첫사랑인 이○○와 같이 꿀같이 단 세월을 보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주 얌전한 시골색시가 되어 충실한 아내 노릇 며느리 노릇을 잘 한다고 전해 왔다.”

의의

최초의 여성잡지 『여자지남』(1908) 이후 계몽적 성격의 여성잡지가 꾸준히 발간되며 1920년대에도 다양한 계층의 여성잡지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장한』의 발간을 가능케 했다. 이 잡지는 일차적으로 기생을 주된 필자와 독자층으로 설정한 잡지였고, 일제강점기 근대 기생들이 사회변화 속에서 자신들의 의견과 입지를 공적 공간에 드러낸 잡지였다.

RDF

주어 목적어 관계
장한 장한사 A은 B에 의해 제작되었다.
장한 최서해 A은 B에 의해 편집되었다.
장한 김보패 A은 B에 의해 발행되었다.
장한 기생 A은 B에 의해 집필되었다.
장한 1927년 A은 B에 창간되었다.
장한 대중잡지 A은 B로 분류된다.
장한 근대 B는 A의 배경이다.
장한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A은 B에 소장되었다.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장한(長恨))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장한 (한국 근대문학 해제집 IV - 문학잡지(1907~1944))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기생들이 쓰고 엮은 동인지 장한 - 1927. 1 (한국잡지백년2, 2004. 5. 15., 최덕교)

작성자 및 기여자

우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