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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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사임당 신씨의 초상화

시대 조선시대
본명 불명
별칭 사임당(師任堂), 인임당(姻姙堂),임사재(姙師齊)
출생 1504년 12월 5일 조선 강원도 강릉 북평촌
사망 1551년 6월 20일(46세) 조선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율곡촌
직업 문인,유학자,화가,작가,시인
종교 유교(성리학)
가족 아버지:신명화, 어머니:용인 이씨, 남편:이원수 자녀: 아들 이선,이번,율곡 이이,이우

딸 매창 등 4남3녀

주요 작품 초충도, 수박과 들쥐, 포도

내용

신사임당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이다. 

조선시대 율곡 이이와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로도 알려져있다.


생애

1504년 12월 5일 강원도 강릉부 태생으로, 아버지 신명화용인 이씨 집안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외가이자 생가인 오죽헌은 아직도 보존되고 있다.

사임당은 출가하여 친정 어머니와 사는 덕분에, 그 시절 결혼과 가정을 부양하느라 바빴던 여성들과 다르게, 비교적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많았으며 덕분에 자유롭게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사임당은 기억력이 좋아 한학의 기본 서적을 금방 익혔다. 또한, 뛰어난 자수와 바느질 솜씨 덕분에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어머니가 자수를 뜨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자, 그것을 본 외할아버지가 7세부터 사임당이 그림을 배우도록 했다. 그림 중에서는 특히나 산수화와 포도, 풀 등을 그리는 재주가 뛰어났다.

신명화는 덕수 이씨 형제의 조카인 이원수를 사위로 정했다. 신명화는 신사임당의 서화 능력을 가장 중요시하였으며, 이 능력을 키워줄 상대를 골랐다. 너무 강한 집안으로 새로 시집 갈 경우엔 그림 활동을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고, 너무 가난한 집안에서는 살림살이하느라 바빠 그림 활동을 하지 못 할 거라 생각했기에 그 중간정도의 능력을 가진 이원수의 집안에 시집을 보냈다.

1522년 8월 20일, 19세에 이원수와 결혼하여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던 신사임당은 남편의 동의를 얻어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달 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율곡리에서 살기도 했으며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때, 셋째 아들인 이이는 강릉에서 낳았다.

1551년,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해 여름에 남편과 아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남편 이원수가 사망했다.

특징

신사임당은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이는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에서 따왔다고 한다.

사임당은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 눈물을 지었다던가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그만큼 사임당이 예술가로서 지녀야할 감수성과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뛰어난 감수성 뿐만 아니라, 뛰어난 통찰력과 판단력도 예술가로서의 재능에 힘을 보탰다.

후세의 학자들과 시인들은 신사임당의 작품을 모두 극찬했다. 그림으로 채색화나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 자료

  • 그림 자료
  • 영상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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