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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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향리의 모습

대부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향리의 모습을 살펴보면 상관에게는 아부하고, 하급자들에게는 간사하고 냉혹한 이미지로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향리에 대해 이러한 기억을 가지게 된 데에는 여러 원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공식적인 역사교육에 있다. 공식적 역사교육에서는 특정한 것들만 기억하다보니 향리의 순기능적 요소들은 집단적으로 망각된 것이다. 따라서 향리는 온갖 부정부패의 상징이 되었고 민중을 핍박하는 사람의 이미지로 남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는 미디어로부터의 영향에 있다. 미디어는 일부 지식층들에서 나아가 광범위한 독자층과 관객층을 확보하여 큰 파급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아래로부터의 역사’에서조차 소외된 민중들의 집단 기억을 재생시켜 그 목소리를 대변하다보니, 새로운 역사담론 속에서도 향리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이미지로 떠올려져 환영받지 못했다.

다양한 계층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는 향리의 모습

민중들의 기억은 ‘거창가’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거창가’에서는 부족한 만여석을 채우기 위해 향리들에 백성들에게 물어내게 하여 고통을 받는 백성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민중들에게 향리란 수탈을 일삼는 가혹한 관리로 기억되었다. 양반 지배층에게도 향리는 부정적인 존재였다. 간사하지 않으면 이서가 될 수 없다고 하며 양반들이 직접 향리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향리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도 존재했다. 헐버트의 글에 따르면, 향리는 모든 사람들이 저지르는 과오에 대한 속죄양이라고 표현하여 향리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았다. 18세기 이후에는 중앙 중심적 세제의 개혁으로 대동법과 균역법의 실시되며, 지방관청들은 만성적인 재정결핍에 시달리게 되었다. 각종 부세수취와 재정운영권이 집중된 수령은 향리에게 재원마련을 떠맡겼고, 이에 따라 향리는 재원마련의 책임자로 거듭나게 되며 죄를 대신 안고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향리의 역할

향리는 호구파악과 부세수취 등의 실질업무를 담당하고, 월 삭료뿐만이 아니라 각종 업무처리비, 관둔전 경작 등의 보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수입을 얻게 되며 사족에 버금가는 층과 노비와 비슷한 계층으로 점차 분화되었다.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 향리는 상층향리는 군공 순절 등 사족에 비견되는 명분을 획득하고 향리후손은 선조의 업적을 적극 활용하여 각 지역을 대표하는 향리가문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향리는 지방사회의 안정을 위해 수령, 사족과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었다. 수령은 왕권의 대리인으로서 중앙 정부의 입장으로 세금을 걷었다. 하지만 왕을 대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덕을 베풀어 세금을 적게 걷어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줘야 했던 상반되는 두 가지의 역할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향리는 수령과 파트너십을 발휘하여 같은 국가권력의 대변자로 세금문제를 책임지고, 사족과는 지역이익에 대한 연대감을 갖고 있었으며, 사족과 수령의 계급적 이해 공유를 통해 지방사회는 안정적으로 잘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향리는 관노와 관속을 견제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관노비는 향리의 자리가 부족할 때 글을 아는 관노비들을 임시 향리인 가리로 삼았는데, 이를 통해 향리로 호적 상의 신분상승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관노비는 공공재산으로, 부인이나 첩을 둘 수 없는데, 관노비의 주인 역할인 호장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종모법으로 관노비의 수가 급증하게 되며 향리의 결속력이 강해졌다. 향리는 근대 이후 근대식 교육을 통해 새로운 변화에 맞추어 신속하게 적응해 나가며 엘리트층을 차지할 수 있게 된 능동적인 존재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작성자 및 기여자

참고 문헌

  • 한성대학교 글로컬역사트랙 <2017 글로컬역사문화의 이해> 강의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