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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가 이광사가 쓴 『서결(書訣)』 중 자서(自序)에 해당하는 내용을 반박한 글이다. 행서로 썼으며 서첩으로 장황되어 있다. 맨 앞에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라는 제목을 써놓았다. ‘원교필결(員嶠筆訣)’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광사 필 서결(李匡師筆書訣)을 가리킨다. 김정희는 이광사의 『서결』 중 모두 아홉 가지 내용을 들어 비판했으며, 마지막에는 운필법(運筆法)과 선본(善本) 학습에 대한 제안을 하였다. 조목별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정희가 이광사가 쓴 『서결(書訣)』 중 자서(自序)에 해당하는 내용을 반박한 글이다. 행서로 썼으며 서첩으로 장황되어 있다. 맨 앞에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라는 제목을 써놓았다. ‘원교필결(員嶠筆訣)’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광사 필 서결(李匡師筆書訣)을 가리킨다. 김정희는 이광사의 『서결』 중 모두 아홉 가지 내용을 들어 비판했으며, 마지막에는 운필법(運筆法)과 선본(善本) 학습에 대한 제안을 하였다. 조목별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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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뉘어 쓰는 언필(偃筆)의 폐해를 지적한 것에 대해 묵법(墨法)에 대한 영향은 한마디도 없고 필법(筆法)만을 갖고 논한 것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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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을 시작할 때 붓털을 펴서 날카로운 칼로 자른 듯해야 한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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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단단하게 다지는 축필법(築筆法)이 본래의 의미와 방법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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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이 앞서고 손이 뒤 따른다[筆先手後]는 주장에 대해 선후가 뒤바뀐 점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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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찍는 법[點法]에 있어 형태는 뾰족하되 붓털은 펴지게 한다는 주장의 모순됨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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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반듯하고 가지런한 결구(結構)를 비판하며 그 대표적인 예로 당(唐)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顏眞卿)의 글씨를 거론한 것에 대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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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가 자신의 주장을 왕희지의 여러 서첩과 결부시킨 것에 대하여 현존하는 왕희지 서첩이 대부분 위작이며 진안(眞贋)이 뒤섞인 것이라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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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가 한예(漢隷)의 품제(品第)를 다루며 예기비(禮器碑)를 최고로 친 것에 동의하면서도 수선비(受禪碑)를 함께 거론한 것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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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가 천품은 뛰어났으나 배움이 없었다고 한 뒤, 고금 법서(法書)의 선본(善本)을 보지 못하고 대가(大家)에게 배우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형태 및 특징==
 
==형태 및 특징==

2022년 11월 29일 (화) 19:23 판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金正喜 筆 書員嶠筆訣後)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jpg

[이광사 '서결 전편']


기본정보

작품 소개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조선 후기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서결ㆍ전편』의 자서(自序)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 비판한 글을 행서로 쓴 것이다.김정희가 행서로 쓴 친필 원고라는 점에서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김정희가 이광사의 서예 이론을 전반적으로 검토하여 반론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서예사적 의의도 높다. 본 유물의 내용은 필사본인 『완당선생전집·서원교필결후(阮堂先生全集·書圓嶠筆訣後)』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으나 일부 차이가 발견된다는 점에서도 중요성을 가진다. 또한 김정희가 서예 훈련을 위해 금석문 고증의 필요성을 강조한 부분은 조선시대 서예 이론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줄 뿐 아니라 김정희가 구축한 서론(書論)의 핵심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김정희의 행서를 통해 추사체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첩에 수록된 김정희의 수묵산수도(水墨山水圖) 3점을 통해 김정희 문인화(文人畵)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어 가치가 높다.

구성 및 내용

본 유물은 김정희의 묵서로 크기는 가로 9.1㎝ 세로 23㎝이며 총 30폭의 서첩이다. 내용은 제2장~제13장에 23엽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3장의 제26엽에는 별도의 색지에 행서로 8행의 제발을 썼다. 제1장 1~2엽에는 난초가 그려져 있으며, 제14장 27엽에는 황토색 종이에 산수화를 그렸다. 28엽에는 흰색 종이에 산수화를 그렸으며 제15장 29~30엽에는 바위, 나무, 사람이 있는 그림이 있다.

본 유물에서 김정희는 원교 이광사의 ‘언필(偃筆)’ 이론을 ‘가장 말이 안 되는 소리(最不成說)’라고 비판했다. 이광사의 언필 이론이란 붓털을 곧게 세워서 운필하지 않고 붓이 한 방향으로 누운 채 운필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살아있는 글씨를 쓰기 위해서 붓의 한 면만을 이용하여 종이와 붓털이 닿는 면이 거의 바뀌지 않는 상태로 붓이 누운 채 진행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김정희는 언필로 쓰면 편봉(偏鋒)이 되어 한쪽 면만을 쓰게 되어 좋은 글씨가 나올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며 이광사의 이론을 반박하였다.

김정희가 이광사가 쓴 『서결(書訣)』 중 자서(自序)에 해당하는 내용을 반박한 글이다. 행서로 썼으며 서첩으로 장황되어 있다. 맨 앞에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라는 제목을 써놓았다. ‘원교필결(員嶠筆訣)’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광사 필 서결(李匡師筆書訣)을 가리킨다. 김정희는 이광사의 『서결』 중 모두 아홉 가지 내용을 들어 비판했으며, 마지막에는 운필법(運筆法)과 선본(善本) 학습에 대한 제안을 하였다. 조목별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붓을 뉘어 쓰는 언필(偃筆)의 폐해를 지적한 것에 대해 묵법(墨法)에 대한 영향은 한마디도 없고 필법(筆法)만을 갖고 논한 것을 비판하였다.
    • 획을 시작할 때 붓털을 펴서 날카로운 칼로 자른 듯해야 한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비판하였다.
      • 붓을 단단하게 다지는 축필법(築筆法)이 본래의 의미와 방법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비판하였다.
        • 붓이 앞서고 손이 뒤 따른다[筆先手後]는 주장에 대해 선후가 뒤바뀐 점을 비판하였다.
          • 점을 찍는 법[點法]에 있어 형태는 뾰족하되 붓털은 펴지게 한다는 주장의 모순됨을 비판하였다.
            • 네모반듯하고 가지런한 결구(結構)를 비판하며 그 대표적인 예로 당(唐)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顏眞卿)의 글씨를 거론한 것에 대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
              • 이광사가 자신의 주장을 왕희지의 여러 서첩과 결부시킨 것에 대하여 현존하는 왕희지 서첩이 대부분 위작이며 진안(眞贋)이 뒤섞인 것이라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 이광사가 한예(漢隷)의 품제(品第)를 다루며 예기비(禮器碑)를 최고로 친 것에 동의하면서도 수선비(受禪碑)를 함께 거론한 것을 비판하였다.
                  • 이광사가 천품은 뛰어났으나 배움이 없었다고 한 뒤, 고금 법서(法書)의 선본(善本)을 보지 못하고 대가(大家)에게 배우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형태 및 특징

의의 및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