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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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金正喜 筆 書員嶠筆訣後)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jpg


기본정보

분류 내용
분류 기록유산/서간류/서예
수량/면적 1첩
지정(등록)일 2018.06.27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02-11(성북동,간송미술관)
시대 19세기 전반
소유자(소유단체) 전***
관리자(관리단체) 간송미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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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조선 후기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서결ㆍ전편』의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 비판한 글을 행서로 쓴 것이다. 맨 앞에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라는 제목을 써놓았으며‘원교필결(員嶠筆訣)’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광사 필 서결(李匡師筆書訣)을 가리킨다. 김정희가 행서로 쓴 친필 원고라는 점에서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김정희가 이광사의 서예 이론을 전반적으로 검토하여 반론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서예사적 의의도 높다. 본 유물의 내용은 필사본인 [『완당선생전집·서원교필결후(阮堂先生全集·書圓嶠筆訣後)』]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으나 일부 차이가 발견된다는 점에서도 중요성을 가진다. 또한 김정희가 서예 훈련을 위해 금석문 고증의 필요성을 강조한 부분은 조선시대 서예 이론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줄 뿐 아니라 김정희가 구축한 서론의 핵심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김정희의 행서를 통해 추사체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첩에 수록된 김정희의 수묵산수도(水墨山水圖) 3점을 통해 김정희 문인화(文人畵)의 일면을 확인할 수도 있다.

구성 및 내용

본 유물은 김정희의 묵서로 크기는 가로 9.1㎝ 세로 23㎝이며 총 30폭의 서첩이다. 내용은 제2장~제13장에 23엽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3장의 제26엽에는 별도의 색지에 행서로 8행의 제발을 썼다. 제1장 1~2엽에는 난초가 그려져 있으며, 제14장 27엽에는 황토색 종이에 산수화를 그렸다. 28엽에는 흰색 종이에 산수화를 그렸으며 제15장 29~30엽에는 바위, 나무, 사람이 있는 그림이 있다.

본 유물에서 김정희는 붓털을 곧게 세워서 운필하지 않고 붓이 한 방향으로 누운 채 운필하게 해야 한다는, 즉 붓의 한 면만을 이용하여 붓이 누운 채 진행하게 한다는 원교 이광사의 언필(偃筆) 이론을 ‘가장 말이 안 되는 소리(最不成說)’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김정희는 언필로 쓰면 한쪽 면만을 쓰게 되어 좋은 글씨가 나올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며 이광사의 이론을 반박하였다.

김정희는 이광사의 『서결』 중 모두 아홉 가지 내용을 들어 비판했으며, 마지막에는 앞서 거론한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운필법(運筆法)과 당비(唐碑)의 선행 학습을 통한 왕희지 고법(古法)을 제안하였다. 아홉 가지의 지적 내용을 조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붓을 뉘어 쓰는 언필(偃筆)의 폐해를 지적한 것에 대해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에 대한 영향은 한마디도 없고 필법(筆法)만을 갖고 논한 것을 비판하였다.
  • 획을 시작할 때 붓털을 펴서 날카로운 칼로 자른 듯해야 한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비판하였다.
  • 붓을 단단하게 다지는 축필법(築筆法)이 본래의 의미와 방법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비판하였다.
  • 붓이 앞서고 손이 뒤 따른다는 주장에 대해 선후가 뒤바뀐 점을 비판하였다.
  • 점을 찍는 법에 있어 형태는 뾰족하되 붓털은 펴지게 한다는 주장의 모순됨을 비판하였다.
  • 네모반듯하고 가지런한 짜임새를 비판하며 그 대표적인 예로 당(唐)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顏眞卿)의 글씨를 거론한 것에 대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
  • 이광사가 자신의 주장을 왕희지의 여러 서첩과 결부시킨 것에 대하여 현존하는 왕희지 서첩이 대부분 위작이며 참과 거짓이 뒤섞인 것이라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 이광사가 한예(漢隷)의 품제(品第)를 다루며 예기비(禮器碑)를 최고로 친 것에 동의하면서도 수선비(受禪碑)를 함께 거론한 것을 비판하였다.
  • 이광사가 천품은 뛰어났으나 배움이 없었다고 한 뒤, 고금 법서의 선본(善本)을 보지 못하고 대가(大家)에게 배우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형태 및 특징

표지에 ‘완당시병완(阮堂試病腕)’이라고 쓰인 제목의 종이조각이 있다. 24면에 걸쳐 글씨가 쓰여 있고, 서첩 말미에 김정희의 수묵산수(水墨山水) 3점이 함께 실려 있다. 각 면의 크기는 세로 23㎝, 가로 9.1㎝이다. 곳곳에 ‘중봉(中鋒)’ 인장이 찍혀있고, 앞뒤로는 ‘현비(懸臂)’, ‘원정사(元貞士)’, ‘완당(阮堂)’, ‘곡인(穀人)’ 인장이 찍혀 있다.

의의 및 평가

비록 김정희의 필사본인 『완당선생전집·서원교필결후』와 일부 차이가 있지만 필법 훈련에 있어 금석학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내용은 우리나라 서예 이론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행서체로 쓴 추사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으며 난초 그림과 산수화도 수록되어 있어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조선 후기 서예 이론서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이광사의 『서결』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논박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청조(淸朝)의 금석고증학(金石考證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비학(碑學)의 이론을 섭렵했던 김정희의 시각으로 볼 때 이전 세대인 이광사의 이론적 체계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관련자료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대백과

두산백과 두피디아

한국학술지인용색인


작성자: 황지원(2211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