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홍석준 (2011197) (토론 | 기여) |
홍석준 (2011197) (토론 | 기여) |
||
6번째 줄: | 6번째 줄: | ||
| colspan="2" style="text-align:center;" |[[파일:Xz1.png|400px]]<ref>[ 사적 제354호 서울 탑골공원 (서울 塔골公園),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013.12.23,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ulPageNo=1®ion=2&searchCondition=%ed%83%91%ea%b3%a8%ea%b3%b5%ec%9b%90&searchCondition2=&s_kdcd=00&s_ctcd=00&ccbaKdcd=13&ccbaAsno=03540000&ccbaCtcd=11&ccbaCpno=1331103540000&ccbaCndt=&ccbaLcto=&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cbaPcd1=&chGubun=&header=view&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pageNo=1_1_2_0 (2020.12.03)]</ref> | | colspan="2" style="text-align:center;" |[[파일:Xz1.png|400px]]<ref>[ 사적 제354호 서울 탑골공원 (서울 塔골公園),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013.12.23,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ulPageNo=1®ion=2&searchCondition=%ed%83%91%ea%b3%a8%ea%b3%b5%ec%9b%90&searchCondition2=&s_kdcd=00&s_ctcd=00&ccbaKdcd=13&ccbaAsno=03540000&ccbaCtcd=11&ccbaCpno=1331103540000&ccbaCndt=&ccbaLcto=&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cbaPcd1=&chGubun=&header=view&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pageNo=1_1_2_0 (2020.12.03)]</ref> | ||
|- | |- | ||
− | | style="width: | + | | style="width:90px; text-align:center;"|'''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
|- | |- | ||
| style="text-align:center;"|'''면적''' || 15,051㎡ | | style="text-align:center;"|'''면적''' || 15,051㎡ |
2020년 12월 4일 (금) 02:23 판
서울 탑골공원 (서울 塔골公園) | |
---|---|
[1] | |
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
면적 | 15,051㎡ |
지정(등록)일 | 1991.10.25 |
위치 | 서울 종로구 종로 99, 외 (종로2가) |
관리자(관리단체) | 서울 종로구 |
목차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99 (종로2가)에 위치한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탑공원', '탑동공원(塔洞公園)', 그리고 '파고다 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이름의 유래
본래 이 일대는, 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탑골' 또는 '탑동'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에 따라, 공원이 '탑골공원' 말고도 '탑동공원(塔洞公園)'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또한, 이 공원의 또다른 이름인 '파고다 공원'의 '파고다'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 가지 가설이 있다. 첫 번째로, 빈 공터로 남아있던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도록 건의한 영국인 브라운이 ‘탑이 있는 공원’이라는 뜻을 담아서 이 공원을 '파고다 공원(Pagoda Park)'이라고 부르는 것을 건의했을 거라는 가설이 있다.
다음으로, 조선 후기의 사람들은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을 '백탑'이라고 불렀는데, 이 '백탑(Pagtab)'이라는 음이 변해서 파고다가 되었다는 가설이 있다.[2]
이용안내
오는 길
- 지하철
지하철 역 | 지하철 노선 | 도보시간 |
---|---|---|
종로3가역1번출구 | 1호선 | 도보 3분 |
종로3가역2-1번출구 | 3호선 | 도보 5분 |
종로3가역(탑골공원)5번출구 | 5호선 | 도보 4분 |
- 버스
버스정류장 | 버스번호 | 도보시간 |
---|---|---|
남인사마당 | (순환)03 | 도보 3분 |
금강제화 | (마을)종로01, 종로02 | 도보 2분 |
종로2가사거리 | (간선)470, 741, N37
(직행)1150, 5007, 9003, 9300 (급행)8100 (광역)M4101, M4102 |
도보 4분 |
인사동.탑골공원 | (관광)TOUR11 | 도보 3분 |
종로3가.탑골공원 | (간선)101, 103, 140, 143, 150, 160, 201, 260, 262, 270, 271A, 271B, 273, 370, 720, 721, N15, N26, N62
(지선)7212 (직행)9301 (순환)04 |
도보 3분 |
시설의 변화
1897~1909-왕실 소유의 도시공원
원래 이곳에는 절이 위치해있었다. 고려 때는 흥복사라 불렸고, 조선 전기에 절을 넓히면서 원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으로 인해 연산군과 중종 때 절이 폐사되었다. 그 후, 탑골공원은 텅 비어있는 공터로 남아있었다. 이는 이자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이 1897년에 작성한 기행문에서 알 수 있다. 그녀는 당시의 빈 터를 "백색 석탑은 빽빽이 들어선 주택을 뒤에 완벽하게 가려져 있는데, 이 도시에서 보기 드물게 나무가 울창한 숲을 가지고 있다. (…중략…) 석탑자리는 옵쭉 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아서 석탑 전체를 사진에 담으려는 사람은 아마도 근처의 담으로 기어 올라가야 할 것이다(이자벨라 비숍, 1994: 56-57)"라고 묘사했다.[3]
그러다 1897년, 영국인 총세무사 브라운(John McLeavy Brown: 1835~1926)의 건의를 통해 이곳을 근대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이름에서 이 공원의 이름을 파고다공원이라고 명명했다. 이에 따라, 공원부지 확보를 위해서 민가 철거가 이루어졌고, 동시에 간단한 공원시설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는 1902년 개원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이 때, 민가와의 경계를 위한 담장과 북문과 남문이 먼저 조성되었고, 이후 팔각정이 조성되었다.
1910~1944-상업시설의 도입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후, 탑골공원의 관할은 총독부로 이관되었다. 이후, 총독부는 연평균 2,170원 50전을 투입해서 정자, 벤치, 화단, 회유도로, 전등, 수도, 온실 등의 시설을 설치했다.
1945~2000
2000~
문화재
관련 자료
영상
사진
작성자
출처 및 참고문헌
출처
- ↑ [ 사적 제354호 서울 탑골공원 (서울 塔골公園),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013.12.23,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ulPageNo=1®ion=2&searchCondition=%ed%83%91%ea%b3%a8%ea%b3%b5%ec%9b%90&searchCondition2=&s_kdcd=00&s_ctcd=00&ccbaKdcd=13&ccbaAsno=03540000&ccbaCtcd=11&ccbaCpno=1331103540000&ccbaCndt=&ccbaLcto=&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cbaPcd1=&chGubun=&header=view&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pageNo=1_1_2_0 (2020.12.03)]
- ↑ "탑골공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0.12.03,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835 (2020.12.03)
- ↑ 김혜경,「탑골공원, 기억의 층위에 대한 해석」, 한국전통문화연구, 제14권,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한국전통문화연구소, 2014, 1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