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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년 4월 서울 | + | 1969년 4월 서울 중구에 세워진 다방 겸 소극장. 극단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56626&cid=46664&categoryId=46664 자유극장] 대표이자 여류무대디자이너인 [[이병복]]이 개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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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페떼아뜨르]]는 그 이름에서 보듯 살롱형 소극장이다. 극단 자유극장(自由劇場) 대표이며 여류디자이너인 [[이병복]](李秉福)이 | + | [[까페떼아뜨르]]는 그 이름에서 보듯 살롱형 소극장이다. 극단 자유극장(自由劇場) 대표이며 여류디자이너인 [[이병복]](李秉福)이 개관한 이 극장은 프랑스의 전위극 작가인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78100&cid=44546&categoryId=44546 이오네스코]의 작품으로 개막했다. 다방겸용이었기 때문에 80석 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로서 무대도 한쪽 귀퉁이에 간단하게 만들어졌다. 낮에는 차를 팔고 밤에는 공연을 했는데 그것도 매일이 아닌 일주일에 몇 번씩 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설립자인 [[이병복]]이 프랑스로 유학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파리의 살롱형 소극장을 본뜬 것이었다. |
===개설 계기=== | ===개설 계기=== | ||
'''''Q. 1968년 명동에 생긴 '떼아뜨르'라는 카페가 소극장운동의 효시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카페는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 '''''Q. 1968년 명동에 생긴 '떼아뜨르'라는 카페가 소극장운동의 효시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카페는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 ||
− | A. 그 당시에 연극하는 극장이라고는 충무로에 하나밖에 없었어요. 명동 코너에 있는 국립극장 아시죠? 나중에 삼일로 극장이 생기고 그랬지만 그때로서는 그거 하나뿐이니 극단에서 공연 장소를 배정받는 건 상반기에 한 번, 하반기에 한 번밖에 없었어요. 일 년에 국립극장을 빌려 공연할 수 있는 게 일주일인데, 거기서 준비하는 하루를 빼고 나면 6일인 셈이죠. 그나마 인정해 주는 극단일 때나 두 번을 얻어 할 수가 있었어요. | + | A. 그 당시에 연극하는 극장이라고는 충무로에 하나밖에 없었어요. 명동 코너에 있는 [[국립극장]] 아시죠? 나중에 삼일로 극장이 생기고 그랬지만 그때로서는 그거 하나뿐이니 극단에서 공연 장소를 배정받는 건 상반기에 한 번, 하반기에 한 번밖에 없었어요. 일 년에 국립극장을 빌려 공연할 수 있는 게 일주일인데, 거기서 준비하는 하루를 빼고 나면 6일인 셈이죠. 그나마 인정해 주는 극단일 때나 두 번을 얻어 할 수가 있었어요. |
− | 그러다 보니 우리 단원들이 1년에 2주, 그것도 반 나눠서 6개월에 한 번 일주일씩 공연하는 게 감질나고 허기가 진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좀 지속적으로 공연을 할 수 있을까, 뭔가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제가 또 대표다 보니 급히 돈을 만들어서 장소를 얻어 소극장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까페떼아뜨르]]’가 개관했죠. 그 소극장을 만들었던 경험이 참 보탬이 된 게, 지금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지만, 그 카페를 통해 처음으로 연극에 발 들여놓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오태석]] 씨, 윤대성 씨, 김동훈 씨 등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죠. | + | 그러다 보니 우리 단원들이 1년에 2주, 그것도 반 나눠서 6개월에 한 번 일주일씩 공연하는 게 감질나고 허기가 진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좀 지속적으로 공연을 할 수 있을까, 뭔가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제가 또 대표다 보니 급히 돈을 만들어서 장소를 얻어 소극장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까페떼아뜨르]]’가 개관했죠. 그 소극장을 만들었던 경험이 참 보탬이 된 게, 지금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지만, 그 카페를 통해 처음으로 연극에 발 들여놓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오태석]] 씨, [[윤대성]] 씨,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2025&cid=46664&categoryId=46664 김동훈] 씨 등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죠. |
‘떼아뜨르’는 월요일은 대학 극단, 화요일과 주말은 자유극장에서 쓰고, 금요일은 민속극을 공연하는 방식으로 운영했어요. 이렇게 학생들도 사용하고, 일반 다른 극단에서도 참여하는 걸로 엮어가면서 8년 정도 했던 것 같아요. 고생도 많았지만 그 카페의 동창생들이 있어 보람 있어요. 대학 다니던 학생들이 가방 들고 학교 끝나면 카페에 모였고, 프로그램이 바뀔 때마다 구경 왔던 친구들이 미국에 가서 자리 잡고 사는데 ‘까페 떼아뜨르 동창회’라는 걸 만들었대요. 저는 못 가봤는데 남편이 갔을 때 몰려와서 동창회 하자고 했대요. 생각하면 참 기뻐요. | ‘떼아뜨르’는 월요일은 대학 극단, 화요일과 주말은 자유극장에서 쓰고, 금요일은 민속극을 공연하는 방식으로 운영했어요. 이렇게 학생들도 사용하고, 일반 다른 극단에서도 참여하는 걸로 엮어가면서 8년 정도 했던 것 같아요. 고생도 많았지만 그 카페의 동창생들이 있어 보람 있어요. 대학 다니던 학생들이 가방 들고 학교 끝나면 카페에 모였고, 프로그램이 바뀔 때마다 구경 왔던 친구들이 미국에 가서 자리 잡고 사는데 ‘까페 떼아뜨르 동창회’라는 걸 만들었대요. 저는 못 가봤는데 남편이 갔을 때 몰려와서 동창회 하자고 했대요. 생각하면 참 기뻐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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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서울 명동 뒷골목에 위치한 [[까페떼아뜨르]]는 개관하자마자 연극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고, | + |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서울 명동 뒷골목에 위치한 [[까페떼아뜨르]]는 개관하자마자 연극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고, [[소극장운동]]의 기폭제가 될 만큼 상연목록 선정에서도 신선감을 주었다. 자유극장의 상임연출가라 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326&cid=41708&categoryId=41737 김정옥](金正鈺) 역시 불문학 전공에다가 프랑스유학을 했기 때문에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35464&cid=43667&categoryId=43667 전위극]을 주로 공연하면서 신진극작가 발굴에 나섰고, 그 결과 [[오태석]](吳泰錫)·[[윤대성]](尹大星)·[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59046&cid=46645&categoryId=46645 김영태](金榮泰)·[[장윤환]](張潤煥) 등의 신작들이 자주 무대에 올려졌다. 서구의 [[전위극]]과 신작창작극을 조화시켜 나간 것이다. 그 중 우리나라 연극사상 최초의 [[일인극]],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90050&cid=42612&categoryId=42612 모노드라마]라고 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2025&cid=46664&categoryId=46664 김동훈](金東勳)의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오태석]] 작·연출)는 일년 이상이라는 장기 공연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단막극 페스티벌과 대학극 페스티벌(서강대학교·한양대학교·건국대학교·동국대학교 등이 참가)을 개최했고, 명창초대 판소리감상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1527&cid=58721&categoryId=58724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 등을 공연함으로써 근대연극사상 가장 [[소극장운동]]다운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문화의식이 없는 관(官)으로부터 여러 가지 수난을 겪었다. 공연법과 보건법 등의 저촉에 따른, 잦은 휴관이 그것이었다. 결국, 1975년 11월에 <이화부부>(金榮泰 작, 李允榮 연출) 공연을 끝으로 폐관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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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까페떼아뜨르&ridx=0&tot=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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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까페떼아뜨르 (199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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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페 떼아뜨르에 얽힌 사건과 에피소드를 빛바랜 흑백사진과 함께 써내려간 저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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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1832 네이버책] | ||
==의의와 평가== | ==의의와 평가== | ||
− | 이 극장은 1950년대 말엽에 원각사(圓覺社)를 중심으로 잠시 벌어졌던 | + | 이 극장은 1950년대 말엽에 원각사(圓覺社)를 중심으로 잠시 벌어졌던 [[소극장운동]]을 계승하여 1970년대 연극운동의 새 지평을 연 소극장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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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방법과 연락처== | ==찾아가는 방법과 연락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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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까페떼아뜨르]] ||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 || | + | | [[까페떼아뜨르]] ||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 || A에서 B가 공연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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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장소]] [[분류:극장]] [[분류:서유라]] [[분류:이경선]] | + | [[분류:장소]] [[분류:극장]] [[분류:이병복]] [[분류:서유라]] [[분류:이경선]] [[분류:조영은]] |
2018년 6월 24일 (일) 18:08 기준 최신판
까페떼아뜨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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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명 | 까페떼아뜨르 |
유사명칭 | 카페떼아뜨르 |
위치 |
까페떼아뜨르
목차
개요
1969년 4월 서울 중구에 세워진 다방 겸 소극장. 극단 자유극장 대표이자 여류무대디자이너인 이병복이 개관하였다.
개설
극장사진
설명
까페떼아뜨르는 그 이름에서 보듯 살롱형 소극장이다. 극단 자유극장(自由劇場) 대표이며 여류디자이너인 이병복(李秉福)이 개관한 이 극장은 프랑스의 전위극 작가인 이오네스코의 작품으로 개막했다. 다방겸용이었기 때문에 80석 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로서 무대도 한쪽 귀퉁이에 간단하게 만들어졌다. 낮에는 차를 팔고 밤에는 공연을 했는데 그것도 매일이 아닌 일주일에 몇 번씩 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설립자인 이병복이 프랑스로 유학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파리의 살롱형 소극장을 본뜬 것이었다.
개설 계기
Q. 1968년 명동에 생긴 '떼아뜨르'라는 카페가 소극장운동의 효시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카페는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A. 그 당시에 연극하는 극장이라고는 충무로에 하나밖에 없었어요. 명동 코너에 있는 국립극장 아시죠? 나중에 삼일로 극장이 생기고 그랬지만 그때로서는 그거 하나뿐이니 극단에서 공연 장소를 배정받는 건 상반기에 한 번, 하반기에 한 번밖에 없었어요. 일 년에 국립극장을 빌려 공연할 수 있는 게 일주일인데, 거기서 준비하는 하루를 빼고 나면 6일인 셈이죠. 그나마 인정해 주는 극단일 때나 두 번을 얻어 할 수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 단원들이 1년에 2주, 그것도 반 나눠서 6개월에 한 번 일주일씩 공연하는 게 감질나고 허기가 진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좀 지속적으로 공연을 할 수 있을까, 뭔가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제가 또 대표다 보니 급히 돈을 만들어서 장소를 얻어 소극장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까페떼아뜨르’가 개관했죠. 그 소극장을 만들었던 경험이 참 보탬이 된 게, 지금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지만, 그 카페를 통해 처음으로 연극에 발 들여놓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오태석 씨, 윤대성 씨, 김동훈 씨 등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죠.
‘떼아뜨르’는 월요일은 대학 극단, 화요일과 주말은 자유극장에서 쓰고, 금요일은 민속극을 공연하는 방식으로 운영했어요. 이렇게 학생들도 사용하고, 일반 다른 극단에서도 참여하는 걸로 엮어가면서 8년 정도 했던 것 같아요. 고생도 많았지만 그 카페의 동창생들이 있어 보람 있어요. 대학 다니던 학생들이 가방 들고 학교 끝나면 카페에 모였고, 프로그램이 바뀔 때마다 구경 왔던 친구들이 미국에 가서 자리 잡고 사는데 ‘까페 떼아뜨르 동창회’라는 걸 만들었대요. 저는 못 가봤는데 남편이 갔을 때 몰려와서 동창회 하자고 했대요. 생각하면 참 기뻐요.
기능과 역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서울 명동 뒷골목에 위치한 까페떼아뜨르는 개관하자마자 연극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고, 소극장운동의 기폭제가 될 만큼 상연목록 선정에서도 신선감을 주었다. 자유극장의 상임연출가라 할 김정옥(金正鈺) 역시 불문학 전공에다가 프랑스유학을 했기 때문에 전위극을 주로 공연하면서 신진극작가 발굴에 나섰고, 그 결과 오태석(吳泰錫)·윤대성(尹大星)·김영태(金榮泰)·장윤환(張潤煥) 등의 신작들이 자주 무대에 올려졌다. 서구의 전위극과 신작창작극을 조화시켜 나간 것이다. 그 중 우리나라 연극사상 최초의 일인극, 모노드라마라고 할 김동훈(金東勳)의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오태석 작·연출)는 일년 이상이라는 장기 공연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단막극 페스티벌과 대학극 페스티벌(서강대학교·한양대학교·건국대학교·동국대학교 등이 참가)을 개최했고, 명창초대 판소리감상회,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 등을 공연함으로써 근대연극사상 가장 소극장운동다운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문화의식이 없는 관(官)으로부터 여러 가지 수난을 겪었다. 공연법과 보건법 등의 저촉에 따른, 잦은 휴관이 그것이었다. 결국, 1975년 11월에 <이화부부>(金榮泰 작, 李允榮 연출) 공연을 끝으로 폐관되고 말았다.
관련저서
- 까페떼아뜨르 (1998)
까페 떼아뜨르에 얽힌 사건과 에피소드를 빛바랜 흑백사진과 함께 써내려간 저서이다.
출처 : 네이버책
의의와 평가
이 극장은 1950년대 말엽에 원각사(圓覺社)를 중심으로 잠시 벌어졌던 소극장운동을 계승하여 1970년대 연극운동의 새 지평을 연 소극장이었다.
찾아가는 방법과 연락처
과거 위치한 장소를 찾을 수 없어 대략적으로 표시함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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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떼아뜨르 | 이병복 | A는 B가 개관했다. | |
까페떼아뜨르 | 연극 | A는 B을 공연했다. | |
까페떼아뜨르 | 일인극 | A에서 B가 공연되었다. | |
까페떼아뜨르 |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 | A에서 B가 공연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