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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발간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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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발간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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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일본에 건너간 여자 유학생들은 신지식을 배워 '무인격한 동물'과도 같은 생활을 하는 조선의 여성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을 선도하는 역할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인식했다. 그들은 주체적 의식을 가지고 '여자계'라는 잡지를 발행하였고, 사회적 차원에서의 다양한 여성문제를 잡지 안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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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일본에 건너간 여자 유학생들은 신지식을 배워 '무인격한 동물'과도 같은 생활을 하는 조선의 여성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을 선도하는 역할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인식했다. 그들은 주체적 의식을 가지고 '''여자계'''라는 잡지를 발행하였고, 사회적 차원에서의 다양한 여성문제를 잡지 안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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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계'''는 1917년 6월 말에 활판본으로 창간되어,6) 1927년 1월 "'''女子界''' 第四號"[이후 '''여자계''' 속간호(續刊號)라고 칭함]를 끝으로 계속 발간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제2호는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東京女子留學生親睦會)'를 중심으로 1918년 3월에 발행되었으며, 편집 겸 발행인은 김덕성, 편집부원은 허영숙, 황애시덕, 나혜석, 편집찬조는 전영택, 이광수가 맡았다. 제3호는 1918년 9월 발행되었으며 편집 겸 발행인은 황애시덕이 맡았다. 제4호는 1920년 3월, 제5호는 1920년 6월, 제6호는 1921년 1월에 발행되었으며 편집 겸 발행인은 모두 유영준(劉英俊)으로 올라 있다. 제7호는 현재 소재를 확인할 수 없으나 '''학지광''' 제22호 광고란을 통해 그 목차를 확인할 수 있으며, 1923년 4월 10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실린 글을 통해 재정곤란과 '여자학흥회(女子學興會)'의 활동정체 때문에 제7호를 끝으로 더 이상 발행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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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계'''는 여성들의 손으로 잡지를 발간하면서, 초기에는 '''학지광''' 등의 매체를 통해 잡지 경영의 경험이 있는 전영택, 이광수 등 남성필자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잡지 경영에 필요한 자금 문제와 원고 수집 문제는 이들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여자계'''는 제4호를 시작으로 여자유학생만을 중심으로 한 발간을 시도한다. 이들이 독립경영을 시도한 것은 "文明의 바람이 우리의 낫츨 슷침으로 비로소 눈을 떠보니 벌서 남들은 깨여서 同等權, 參政權을 찻노라고 애를 씀니다. 우리는 이러한 自覺과 自任을 가지고 우리의 남자社會에서 負擔할 우리의 重荷를 萬分之一이라도 난호야 되겟다는 决心" 때문이었다.
  
 
=='''서지사항'''==
 
=='''서지사항'''==

2022년 5월 19일 (목) 16:08 판


정의

1917년 일본 동경(東京)에서 재일(在日) 조선인 여자 유학생 집단에 의해 편집·발행된 회보·여성잡지·기관지.

개설

편찬/발간 경위

1910년대 일본에 건너간 여자 유학생들은 신지식을 배워 '무인격한 동물'과도 같은 생활을 하는 조선의 여성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을 선도하는 역할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인식했다. 그들은 주체적 의식을 가지고 여자계라는 잡지를 발행하였고, 사회적 차원에서의 다양한 여성문제를 잡지 안에 담아냈다.

여자계는 1917년 6월 말에 활판본으로 창간되어,6) 1927년 1월 "女子界 第四號"[이후 여자계 속간호(續刊號)라고 칭함]를 끝으로 계속 발간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제2호는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東京女子留學生親睦會)'를 중심으로 1918년 3월에 발행되었으며, 편집 겸 발행인은 김덕성, 편집부원은 허영숙, 황애시덕, 나혜석, 편집찬조는 전영택, 이광수가 맡았다. 제3호는 1918년 9월 발행되었으며 편집 겸 발행인은 황애시덕이 맡았다. 제4호는 1920년 3월, 제5호는 1920년 6월, 제6호는 1921년 1월에 발행되었으며 편집 겸 발행인은 모두 유영준(劉英俊)으로 올라 있다. 제7호는 현재 소재를 확인할 수 없으나 학지광 제22호 광고란을 통해 그 목차를 확인할 수 있으며, 1923년 4월 10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실린 글을 통해 재정곤란과 '여자학흥회(女子學興會)'의 활동정체 때문에 제7호를 끝으로 더 이상 발행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자계는 여성들의 손으로 잡지를 발간하면서, 초기에는 학지광 등의 매체를 통해 잡지 경영의 경험이 있는 전영택, 이광수 등 남성필자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잡지 경영에 필요한 자금 문제와 원고 수집 문제는 이들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여자계는 제4호를 시작으로 여자유학생만을 중심으로 한 발간을 시도한다. 이들이 독립경영을 시도한 것은 "文明의 바람이 우리의 낫츨 슷침으로 비로소 눈을 떠보니 벌서 남들은 깨여서 同等權, 參政權을 찻노라고 애를 씀니다. 우리는 이러한 自覺과 自任을 가지고 우리의 남자社會에서 負擔할 우리의 重荷를 萬分之一이라도 난호야 되겟다는 决心" 때문이었다.

서지사항

내용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