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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은 1931년에 자신의 고향인 춘천군 신남면 증리 실리마을에서 언덕받이에 움막을 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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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자기네 마름집 아들인 조명희, 조카 영수 등과 뜻을 맞춰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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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야학당을 [[농우회(農友會)]]라고 하고 농민야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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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 일에 열중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해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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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는 농우회를 금병의숙(錦屛義塾)이라고 고쳐 2년 간이학교도 인가받아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고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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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내용으로는 한글과 산수, 지리를 가르쳤다. 강원도에서는 강릉의 율곡의숙과 함께 대표적인 야학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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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33년 서울로 올라가 누이의 집에 의탁하게 되는데, 이때 폐결핵이 발병하게 됨으로써 학교운영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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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4일 (화) 22:58 판

금병의숙

금병의숙.jpg

위치

강원 춘천시 신동면 증리 1072 (금병의숙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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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정보

김유정은 1931년에 자신의 고향인 춘천군 신남면 증리 실리마을에서 언덕받이에 움막을 파고

한때 자기네 마름집 아들인 조명희, 조카 영수 등과 뜻을 맞춰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

이 야학당을 농우회(農友會)라고 하고 농민야학을 펼쳤다.

야학 일에 열중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해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에는 농우회를 금병의숙(錦屛義塾)이라고 고쳐 2년 간이학교도 인가받아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고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교과내용으로는 한글과 산수, 지리를 가르쳤다. 강원도에서는 강릉의 율곡의숙과 함께 대표적인 야학당이다.

그러나 1933년 서울로 올라가 누이의 집에 의탁하게 되는데, 이때 폐결핵이 발병하게 됨으로써 학교운영은 중단되었다.

관련영상

소설가이며 김유정기념사업회의 명예이사장인 전상국님이 고향마을로 다시 내려와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김유정의 야학당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