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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통달하여 밝다’라는 뜻이며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통명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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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등록일===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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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월 8일
희빈 장씨는 이로 인하여 사약을 받게 되고, 희빈 장씨의 시신은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을 통해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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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통명전 뒤뜰에는 샘이 있는데, 1757년에 ‘샘물이 맵도록 차다’고 하여 열천이라 하였다. 통명전 서쪽의 연지는 샘이 마당으로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1485년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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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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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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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 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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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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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전은 창경궁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왕비의 침전으로, 왕대비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484년에 처음 지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것을 광해군 대에 다시 지었고, 1790년에 다시 불에 탔으나 1833년 통명전 오른쪽에 있는 양화당과 함께 다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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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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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전은 창경궁에 있던 내전 건물 중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건물로 19세기 건축 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2023년 6월 17일 (토) 13:42 기준 최신판

통명전전.jpg

지정 등록일

1985년 1월 8일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시대

조선 순조 33년

문화재 설명

통명전은 창경궁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왕비의 침전으로, 왕대비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484년에 처음 지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것을 광해군 대에 다시 지었고, 1790년에 다시 불에 탔으나 1833년 통명전 오른쪽에 있는 양화당과 함께 다시 지었다. 통명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았다. 통명전은 창경궁에 있던 내전 건물 중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건물로 19세기 건축 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