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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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12일 (화) 17:09 판 (새 문서: ==소개== 성북동은 성(城)의 북(北)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은 한양도성이니, 성북동은 한양도성이 만들어진 이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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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성북동은 성(城)의 북(北)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은 한양도성이니, 성북동은 한양도성이 만들어진 이후에 붙은 이름이다.

성북동은 아늑한 마을이었다. 백두대간은 힘차게 달려 내려와 그 일부가 한양의 백악산까지 이른다. 백악산에 이르기 직전 작은 두 봉우리 -구준봉과 응봉-에서 내려온 산자락이 감싸고 있는 마을이 또한 성북동이다. 그 산자락 사이로 흐르던 것이 성북천이었으니, 성북동은 한양과 가깝고, 물이 흐르고, 산이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성북동에 사람을 살게 한 것은 교통과 자연환경이었다. 도성의 바로 밖이라는 교통의 편리함, 산과 물이 어우러진 훌륭한 자연환경은 도성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조선후기의 어느 봄이나 성북동은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가득찼다.

성북동도 근대의 바람을 탔다. 사대문 밖에서 가장 교통이 편리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성북동에는 비교적 중산층으로 불릴만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곧 마을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일제강점 하의 어려운 시절에도 스스로 학교를 지어 자녀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했을 뿐 아니라, 식민지 당국을 상대로 상수도 부설, 버스시간 연장 등의 청원운동을 벌여 더 나은 삶의 공간을 만들고자 힘썼다.

여러 모로 살기 좋은 마을이니 문화예술인들도 모여들었다. 1930년대 초반에 이미 문인촌으로 불릴 만큼 많은 문인들이 성북동에 살았다. 카프의 중심인물이었던 김기진, 구인회의 중심인물인 이태준은 모두 한 동네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며 승려이기도 한 만해 한용운ㄴ도 이곳 성북동의 주민이었다. 간송 전형필은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을 성북동에 지었다. 그리고 만해와 간송과 모두 인연이 있는 또 한명의 독립운동가이자, 수집가인 위창 오세창 역시 성북동에 살며 이들과 교류했다. 문인과 독립운동가만 이곳에 산 것은 아니었다.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두 거인, 근원 김용준과 수화 김환기는 늙은 감나무가 열리는 마당이 있는 같은 집에서 연이어 살았다. 김환기는 성북동에 살던 또 다른 친구인 시인 김광섭의 시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성북동의 마을 이름

  1. '성북동' 동명의 유래
  • 조선후기 영조 때 도성수비를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