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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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성(1911097)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6월 13일 (토) 17:46 판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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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배경

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을 당시에는 민주적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이 한국사회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실제 행동이 더욱 비민주적으로 되어가고 대규모의 부정선거가 자행됨에 따라 이승만정권의 독재를 규탄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민의식의 민주화는 대체로 광범위한 민주적 교육과 6·25전쟁 후 급속한 도시화의 결과이다. 1945년 이래로 민주주의 교육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고, 도시 또는 준도시 사람들이 대중매체를 널리 접촉할 수 있었음은 한국인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식시키는 좋은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민주주의 정치교육의 긍정적 결과는 많은 조사결과 젊은층들이 기성세대들보다 좀더 민주적으로 전향되었음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도시화는 일반국민의 민주적 사회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52년 남한 인구의 17.7%만이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 살았다. 그러나 이는 1955년에 24.5%, 1960년에는 28%로 늘어났다. 이러한 급속한 도시화는 확장된 교육, 6·25전쟁 중 지역에 인구학적 안정의 붕괴, 그리고 사회의 일반적 상업화 등에 기인한다. 정치세력이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으로 양극화됨에 따라 유권자들은 각자의 정치의식의 수준에 따라 누구를 반대하고 누구에게 투표하여야 할 것인가를 쉽사리 알 수 있었다. 비교적 유동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새로이 얻은 민주적 가치를 확인하는 가장 쉽고 뚜렷한 유일의 방법은 비민주적으로 행동하는 여당과 그 후보자들에 대해서 반대투표를 하는 것이었고,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지표를 던지는 것이었다. 1958년 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출신의 의원은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서 오직 13명만 당선되었으나 민주당은 43명이 선출되었다. 반면, 나라 전체를 볼 때 민주당의 79석에 비하여 자유당은 총 126석을 얻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李承晩)은 나라 전체로 볼 때 56%의 지지를 받았으나 서울에서는 38%밖에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도시지역에서 자유당의 약세는 대도시에서 부정선거를 비교적 쉽게 저지를 수가 없었다는 데 기인하고 있다. 하여튼 중요한 점은 이른바 ‘준봉투표(conformity votes)’가 비도시지역에서 팽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화와 도시화의 증대에 따라 이러한 ‘준봉투표’는 급속히 감퇴하여갔고, 이러한 현상이 자유당으로 하여금 더 ‘비민주적’ 수단을 강구하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자유당이 더욱더 강압적 수단을 동원하면 할수록 공정한 선거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을 기회는 그만큼 더 줄어들었다. 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이승만과 그의 정권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여러 문제를 내어서 대중시위를 조작해 내었다. 국토를 양분시켰던 공산주의자들과의 휴전협정을 반대하는 대중시위와 행진, 1952년에서 1956년의 기간중 이승만을 재선에 나서도록 부추겼던 대중시위, 일본 당국의 재일교포 북송결정에 항의하는 대중집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제대중 동원은 1950년대 초반기 동안 어느 정도까지는 이승만의 인기를 회복시키고 유지시켜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국민들 사이에 이승만의 개인적 인기는 사라졌고, 그의 권력은 오로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하여 유지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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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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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및 기여자

윤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