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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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성(1911097)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6월 13일 (토) 17:59 판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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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혁명을 말한다.

배경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을 당시, 민주적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이 한국사회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의 실제 행동이 더욱 비민주적으로 되어가고 대규모의 부정선거가 자행됨에 따라 이승만정권의 독재를 규탄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민의식의 민주화는 대체로 광범위한 민주적 교육과 6·25전쟁 후 급속한 도시화의 결과이다.

1945년 이래로 민주주의 교육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고, 도시 또는 준도시 사람들이 대중매체를 널리 접촉할 수 있었음은 한국인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식시키는 좋은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민주주의 정치교육의 긍정적 결과는 많은 조사결과 젊은층들이 기성세대들보다 좀더 민주적으로 전향되었음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도시화는 일반국민의 민주적 사회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52년 남한 인구의 17.7%만이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 살았다. 그러나 이는 1955년에 24.5%, 1960년에는 28%로 늘어났다. 이러한 급속한 도시화는 확장된 교육, 6·25전쟁 중 지역에 인구학적 안정의 붕괴, 그리고 사회의 일반적 상업화 등에 기인한다. 정치세력이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으로 양극화됨에 따라 유권자들은 각자의 정치의식의 수준에 따라 누구를 반대하고 누구에게 투표하여야 할 것인가를 쉽사리 알 수 있었다. 비교적 유동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새로이 얻은 민주적 가치를 확인하는 가장 쉽고 뚜렷한 유일의 방법은 비민주적으로 행동하는 여당과 그 후보자들에 대해서 반대투표를 하는 것이었고,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지표를 던지는 것이었다.

1958년 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출신의 의원은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서 오직 13명만 당선되었으나 민주당은 43명이 선출되었다. 반면, 나라 전체를 볼 때 민주당의 79석에 비하여 자유당은 총 126석을 얻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李承晩)은 나라 전체로 볼 때 56%의 지지를 받았으나 서울에서는 38%밖에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도시지역에서 자유당의 약세는 대도시에서 부정선거를 비교적 쉽게 저지를 수가 없었다는 데 기인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른바 ‘준봉투표(conformity votes)’가 비도시지역에서 팽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화와 도시화의 증대에 따라 이러한 ‘준봉투표’는 급속히 감퇴하여갔고, 이러한 현상이 자유당으로 하여금 더 ‘비민주적’ 수단을 강구하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자유당이 더욱더 강압적 수단을 동원하면 할수록 공정한 선거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을 기회는 그만큼 더 줄어들었다. 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이승만과 그의 정권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여러 문제를 내어서 대중시위를 조작해 내었다. 국토를 양분시켰던 공산주의자들과의 휴전협정을 반대하는 대중시위와 행진, 1952년에서 1956년의 기간중 이승만을 재선에 나서도록 부추겼던 대중시위, 일본 당국의 재일교포 북송결정에 항의하는 대중집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제대중 동원은 1950년대 초반기 동안 어느 정도까지는 이승만의 인기를 회복시키고 유지시켜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국민들 사이에 이승만의 개인적 인기는 사라졌고, 그의 권력은 오로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하여 유지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원인

1960년 3월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실제적으로 많은 공무원들이 이승만의 당선을 위하여 동원되었다. 이전의 선거에서는 경찰의 개입이 후보자등록·선전활동·투표과정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반하여,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이제 실질적인 선거본부가 되어 투표총계를 조작하고 날조하였던 것이다. 1960년 많은 국민들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趙炳玉)의 죽음으로 다시 실망에 빠졌다. 조병옥은 선거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대적자로 여겨졌었다. 다른 강력한 대적자가 없는 마당에서 이승만의 재선은 확고한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의 적수가 없었으므로 대통령 선거보다 부통령의 경합이 보다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이렇듯 실제 싸움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張勉)과 이승만이 밀어주는 후보자 이기붕(李起鵬) 사이에 벌어졌다. 선거전에서 야당선거원들은 계속해서 체포되고 탄압을 받았다. 반공청년단의 폭력단원들이 선거 당일 시민들이 투표권을 어떻게 행사하는가 감시하기 위하여 각 투표장에 나타났다. 많은 농촌지역에서는 3인조·9인조 등의 ‘조’가 형성되었고, 자유당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가 각 조의 ‘조장’이 되어 ‘조원’들의 자유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책임졌다. 경찰은 공개적으로 자유당후보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선거 결과는 경찰 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서 완전히 날조되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 투표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3분의 1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다. 이기붕은 1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40만 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회에서는 민주당이 선거가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반정부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부정선거와 불법선거를 규탄하고 나섰던 것이다. 민심은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이반되어 있었으므로 대규모의 봉기에 필요하였던 것은 도덕적 분개라는 공통된 감정을 점화시켜줄 수 있는 사건만 있으면 되었다. 4월 초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을 때, 항구도시인 마산의 시민들은 최루탄을 눈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채로 마산 해변가에 버려진 16세 마산상고생 김주열(金朱烈)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그 소년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마산 경찰에 의하여 체포 당했음에 틀림없었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전개

시기 내용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 대구지역 고교생 1,700여명은 학원의 자유를 외치며 데모.
3월 15일 3.15 부정선거, 제4대 정·부통령 선거 투표율 97%, 이승만 이기붕 당선/
마산의거, 민주당 마산시장이 선거부인 공고 후, 시위대 데모
4월 11일 '김주열'군 시체, 마산 중앙부두 200M 앞 바다에서 떠오름/

마산 2차의거, 3만여명의 데모대는 자유당과 관계있는 곳을 부수며 시가지 누빔

4월 18일 고려대생 3천여명 시위 종로 4가에서 폭력배 습격사건 발생
4월 19일 서울 시위 및 경찰발포, 시민 경무대 앞 시위중 경찰은 무차별적 실탄사격 데모는 전국적인 규모, 부산, 광주, 대구, 전주, 청주, 인천에서 데모
4월 20일 전국적으로 시위확산, 대구, 인천, 광주, 수원, 이리 등으로 시위 확산 산발적 데모 계속, 20일부터 24일까지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 데모 계속
4월 25일 교수단 300여명 시위(대통령, 국회의장 등 총사퇴 요구)
4월 26일 이승만대통령 하야성명,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사퇴서 제출

관련인물 및 단체

관련콘텐츠


참고문헌

국가기록원


작성자 및 기여자

윤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