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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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서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13일 (수) 00:08 판 (작성자 및 기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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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951년 무렵, 기생 김영한은 일제강점기에 '청암장'이라 불리던 별장을 매입하여 대원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고급요정을 운영하였다. 대원각은 당시 선운각, 삼청각과 함께 정·재계인물들 중에서도 고위층 인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국내 3대 요정이었다. 3공화국, 5공화국을 지나며 밀실정치의 대표장소로 세상에 알려졌다. 7000여평의 부지 위에 극락전과 일주문을 비롯하여 40여동의 절 건물이 있었고

1987년에 7000여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 등 1천억원대의 부동산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는 것으로 대원각의

요정

요정은 일반 유흥음식점의 일종으로 유흥업 종사자를 두고 주류와 음식물을 판매하며 가무(歌舞)를 행할 수 있는 접객업소를 말한다. 정치운동가·기업인·상인들이 주로 출입하였다. 요정의 주석(酒席)에는 권번(券番) 출신 기생이 한복을 입고 창(唱)·잡가·노랫가락 등을 가야금병창으로 부르거나, 검무·남무(男舞)·북춤 등을 추면서 주흥을 돋우었다.

3대요정

1950∼1970년대 '밀실정치의 무대’였던 서울의 3대 요정 오진암 대원각 삼청각. 세 곳 모두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소형차를 타고 오는 사람은 없다'는 소리를 듣던, 권력자들이 즐겨 찾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이런 곳이 모두 일반 서민들이 위로받고 휴식을 할 수 있는 문화·종교시설로 바뀌게 됐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에 위치했던 700평 단층 한옥의 요정이다. 1953년 개업했으며 서울시에 등록된 음식점 1호 업소다. 1972년 이후락 당시 이 곳에서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 성철 제2부수상이 만나 7ㆍ4 공동성명을 논의하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 외에도 구한말 화가 이병직의 옛 거처로 알려져있으며 경기민요의 대가 안비취가를 양성한 것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하지만 2010년 8월, 당시 소유주였던 건설업체가 비즈니스호텔을 짓겠다며 오진암을 철거했고 이에 종로구청은 오진암의 한옥 건물 몇 개를 부암동으 로 옮겨 이축했다. 현재 '무계원'으로 불리며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72년 개업한 삼청각은 남북적십자회담 및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 장소로 이용된 후로 유신체제가 삼엄했던 4공화국 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어 경영난을 겪자 1990년 ‘예향’이라는 일반 음식점으로 전환해 새출발을 도모했지만, 1999년 12월 결국 폐업하였다. 이후 2000년 5월에 서울시에서 삼청각 부지와 건물을 도시계획시설상 문화시설로 지정하였으며, 리모델링을 통해 2001년 10월 새로운 전통 문화공연장으로 탈바꿈하였다.


기생관광

시주

시주란 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절이나 승려에게 금전, 물건 등을 베풀어주는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 시조(施助)라고도 하며, 단나(檀那)ㆍ단월(檀越)ㆍ화주(化主)라고도 한다. 스님이나 절에 돈이나 물건을 베풀어주는 일. 이 경우 신자들이 시주하는 돈이나 물건은 사찰의 운영이나 스님들의 생활 유지에 중요한 수단이 된다. 김영한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요정 [料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오진암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네이버 지식백과] 삼청각 [三淸閣] (두산백과)

원불교대사전 시주

작성자 및 기여자

김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