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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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1일 (월) 20:08 판

설립일시

1933년 8월

활동

문학단체. 특별히 주장한 목표는 없으나, 경향주의 문학에 반하여 ‘순수예술추구’를 취지로 하여 약 3∼4년 동안 월 2∼3회의 모임과 서너 번의 문학강연회, 그리고 『시와 소설』이라는 기관지를 한 번 발행하였다. 이처럼 활동은 소극적이었으나, 당시 신인 및 중견작가로서 이들이 차지하는 문단에서의 역량 등으로 인해 ‘순수예술옹호’라는 문단의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인물

1933년 8월

이종명(李鍾鳴)·김유영(金幽影)의 발기로 이효석(李孝石)·이무영(李無影)·유치진(柳致眞)·이태준(李泰俊)·조용만(趙容萬)·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 총 9명 결성

발족한 지 얼마 안 되어 발기인인 이종명·김유영과 이효석이 탈퇴하고 그 대신 박태원(朴泰遠)·이상(李箱)·박팔양(朴八陽)이 가입

그리고 유치진·조용만 대신에 김유정(金裕貞)·김환태(金煥泰)가 보충되어 언제나 인원수는 9명이었다.

의의와 평가

조연현은 ‘구인회’의 문학사적인 의의를 시문학파(詩文學派)에서 유도된 순수문학의 흐름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1930년대 이후의 민족문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의로는 근대문학의 성격을 현대문학의 성격으로 전환시키고 발전시킨 점에서 그 문학사적 가치를 보유한다고 지적했다.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한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