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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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15일 (토) 23:2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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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01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강릉이고, 호는 파인(巴人)이다.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삼룡(三龍)으로, 1926년 10월 동환(東煥)으로 개명하였다.

1908년 공립 경성보통학교에 입학해 1912년 졸업했으며, 1916년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대학[東洋大學] 문화학과에 입학했다. 1922년 도쿄유학생들이 창립한 재일조선노동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4년 5월 『금성』에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 하며'로 문단에 등단했다』 같은 해 9월부터 10월 함경북도 나남에 있는 북선일일보사(北鮮日日報社) 조선문판 기자로 복무했고, 같은 해 10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가 되어 1925년 5월까지 근무했다. 1925년 3월 첫 시집인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간했다. 1925년 6월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으며, 1925년 8월부터 KAPF에서 활동했다. 1926년 『중외일보』 사회부기자,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일보』 사회부 차창을 지냈다.

1929년 6월 삼천리사를 운영하며 종합 잡지 『삼천리(三千里)』를 간행했다.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1년 조선가요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8년에는 『삼천리』의 자매지로 문예지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을 발간했다.

1946년 2월 조만식이 이끈 조선민주당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8월 여러 기행문을 엮은 『삼천리강산』을 편찬해 발간했다. 1948년 5월 삼천리사를 재차 창립하고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자수했고,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의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작품

시집

그 외 저작물(소설, 수필, 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