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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주란 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절이나 승려에게 금전, 물건 등을 베풀어주는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 시조(施助)라고도 하며, 단나(檀那)ㆍ단월(檀越)ㆍ화주(化主)라고도 한다. 스님이나 절에 돈이나 물건을 베풀어주는 일. 이 경우 신자들이 시주하는 돈이나 물건은 사찰의 운영이나 스님들의 생활 유지에 중요한 수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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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주란 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절이나 승려에게 금전, 물건 등을 베풀어주는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시조(施助)라고도 하며, 신자들이 시주하는 돈이나 물건은 사찰의 운영이나 스님들의 생활 유지에 중요한 수단이 된다.[[김영한]]은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였는데, [[길상사]]가 개원하던 날, [[김영한]]은 이런 말을 남겼다.
[[김영한]]은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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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만 ….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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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은 종루가 되었듯 밀실정치와 기생관광의 무대였던 대원각의 다른 건물들 역시 극락당, 지장전, 설법전 등으로 바뀌었다. 경내의 크고 작은 건물들도 스님들의 숙소나 불자들의 기도처가 됐다. 이처럼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사찰로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나무기둥에 고기와 술냄새가 하도 진하게 배어있어, 이를 제거하려고 인부들이 기둥을 깍아도 깍아도 냄새가 없어지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 처럼, 요정은 사찰이 되고 기생은 보살이 된 것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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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3일 (수) 01:24 판


소개

1951년 무렵, 기생 김영한은 일제강점기에 '청암장'이라 불리던 별장을 매입하여 대원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고급요정을 운영하였다. 대원각은 당시 선운각, 삼청각과 함께 정·재계인물들 중에서도 고위층 인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국내 3대 요정이었다. 3공화국, 5공화국을 지나며 밀실정치의 대표장소로 세상에 알려졌다. 7000여평의 부지와 건물 40여동 등을 자랑하는 엄청난 규모의 요정이었지만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난 뒤 감명을 받아 당시 시가로 1천억원에 달했던 부지를 시주했다. 이에 연인이었던 시인 백석과의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법정스님은 10년간 이를 사양했지만 결국 김영한의 끊임없는 설득에 못이겨 받아들이게 되었다. 따라서 1995년, 길상사라는 이름의 사찰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요정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요정정치'라고 불릴 만큼 요정은 큰 영향력을 가진 곳이었다. 요정은 객실과 연회석이 마련되어 있고 주류와 음식물을 판매하여 가무를 행할 수 있는 접객업소를 말한다. 유흥업 종사자가 손님 옆에 앉아 술시중을 드는 것이 일반음식점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운동가·기업인·상인들이 주로 출입하였으며, 요정의 주석에는 권번출신 기생이 한복을 입고 창·잡가·노랫가락 등을 가야금병창으로 부르거나, 검무·남무·북춤 등을 추면서 주흥을 돋우었다. 하지만 광복 후 권번에서 교육받은 기생들은 거의 사라지고 단순히 술을 따르면서 말벗이나 희롱의 대상이 되는 이른바 화초기생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요정의 모습이 변질되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요정은 기생이 없어지는 등 예전의 기능을 점차 상실하여 대부분이 전통음식점으로 변하였다. 이처럼 요정의 쇠퇴와 함께 유흥문화의 흐름은 유흥주점(룸살롱)으로 옮겨갔고, 규모 역시 연회 중심에서 개별 중심으로 축소되었다.

3대요정

1950∼1970년대 '밀실정치의 무대’였던 서울의 3대 요정 오진암 대원각 삼청각. 세 곳 모두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소형차를 타고 오는 사람은 없다'는 소리를 듣던, 권력자들이 즐겨 찾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이런 곳이 모두 일반 서민들이 위로받고 휴식을 할 수 있는 문화·종교시설로 바뀌게 됐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에 위치했던 700평 단층 한옥의 요정이다. 1953년 개업했으며 서울시에 등록된 음식점 1호 업소다. 1972년 이후락 당시 이 곳에서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 성철 제2부수상이 만나 7ㆍ4 공동성명을 논의하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 외에도 구한말 화가 이병직의 옛 거처로 알려져있으며 경기민요의 대가 안비취가를 양성한 것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하지만 2010년 8월, 당시 소유주였던 건설업체가 비즈니스호텔을 짓겠다며 오진암을 철거했고 이에 종로구청은 오진암의 한옥 건물 몇 개를 부암동으 로 옮겨 이축했다. 현재 '무계원'으로 불리며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72년 개업한 삼청각은 남북적십자회담 및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 장소로 이용된 후로 유신체제가 삼엄했던 4공화국 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어 경영난을 겪자 1990년 ‘예향’이라는 일반 음식점으로 전환해 새출발을 도모했지만, 1999년 12월 결국 폐업하였다. 이후 2000년 5월에 서울시에서 삼청각 부지와 건물을 도시계획시설상 문화시설로 지정하였으며, 리모델링을 통해 2001년 10월 새로운 전통 문화공연장으로 탈바꿈하였다.

기생관광

시주

시주란 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절이나 승려에게 금전, 물건 등을 베풀어주는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시조(施助)라고도 하며, 신자들이 시주하는 돈이나 물건은 사찰의 운영이나 스님들의 생활 유지에 중요한 수단이 된다.김영한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였는데, 길상사가 개원하던 날, 김영한은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만 ….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은 종루가 되었듯 밀실정치와 기생관광의 무대였던 대원각의 다른 건물들 역시 극락당, 지장전, 설법전 등으로 바뀌었다. 경내의 크고 작은 건물들도 스님들의 숙소나 불자들의 기도처가 됐다. 이처럼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사찰로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나무기둥에 고기와 술냄새가 하도 진하게 배어있어, 이를 제거하려고 인부들이 기둥을 깍아도 깍아도 냄새가 없어지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 처럼, 요정은 사찰이 되고 기생은 보살이 된 것이다.

출처

두산백과 삼청각

시사상식사전 오진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요정

원불교대사전 시주

작성자 및 기여자

김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