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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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2월 13일 (화) 20:3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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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무슬림 개요

"믿는 신앙인이란 하나님과 선지자를 믿되 의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그들의 재산과 생명으로 성전하는 자들이 바로 믿는 신앙인들이라" - 쿠란 49:15[2]

이슬람교을 믿는 사람, 즉 이슬람교도를 뜻한다. 무슬림(혹은 모슬렘)은 남성형 명사로서, 여성형은 무슬리마(muslima, مسلمة)라고 부르지만 흔히 남성형인 무슬림을 총칭으로 사용한다.

무슬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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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성장

프랑스의 이주정책 모델

프랑스의 이주민 증가는 크게 다음 3가지 정책적 배경에 기인한다. 첫째, 자국 내 부족한 노동력 충당 둘째, 인권국가로서의 정치 망명객의 적극적인 포용 셋째, 인도주의 차원에서 난민의 수용이다.


이주 배경

특히 프랑스 이주민의 역사는 단순히 외국 노동자나 난민 등의 국내 유입에 의해서라기보다 프랑스 제국주의 역사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따라서 식민지 해방과 더불어 밀려들기 시작한 이주민들에 대한 프랑스의 이주민정책은 이러한 자국의 이해 관계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알제리 등 과거 식민지 국가에 대해서는 양자협정이 체결돼 있어 예외조항을 마련해 두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성에 기반을 둔 프랑스의 이주민 정책은 1946년에 외국인 근로자들을 충원하기 위한 이민국을 처음으로 출범시키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이민자 대부분이 3D 업종 종사자들이었고, 이들의 입국을 일시적인 이민으로 간주하여 정착문제를 고려한 사회통합 차원에서 이주민정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이들 외국인 근로자들의 체류가 장기화되면서 ‘가족재결합을 위한 이민' 이라는 이름 하에 이들 가족들을 포함한 외국인 근로자들의 영구이민을 허가하면서 프랑스 이주민사가 시작되었다.

이주 중단 선언

1974년 경제성장의 둔화에 따라 공식적 이민 중지 선언으로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공식적 이민 중단의 의미일 뿐, 다양한 형태로 국적 취득의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이주에 대한 개방적인 기조는 유지해왔다. 또한 이주자 문제는 단순한 프랑스 내의 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상황과 국제적 조약 등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절차와 심사가 까다로워지고 엄격해졌다는 면에서, 최근의 이주민정책이 이전과 비교하여 폐쇄적이고 프랑스 자국중심주의로의 전환임에는 틀림없지만 기본적인 다문화정책 방향은 자유ㆍ평등ㆍ박애라는 프랑스 공화국 이념을 거스르지는 않는다.

무슬림 이민자의 유입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오일쇼크가 촉발되기 이전까지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해서 ‘영광의 30년’을 누리게 된다. 폭발적인 성장으로 안락한 삶을 영위하자 프랑스인들은 더 이상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이는 어느 정도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 우리나라에도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인데, 이에 프랑스는 분야별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해야만 했다. 프랑스는 인근 저소득 유럽 국가로부터 이민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뿐만 아니라 과거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무슬림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한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의 이민자들도 수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관련 영상

프랑스의 몰락

오일쇼크 이후

오일쇼크가 촉발된 이후 프랑스의 상황은 전혀 달라지고 오일쇼크로 유럽 전 대륙이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역시 고실업 상태에 놓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20세기 초까지 이민자를 계속 받아들인다. 결국 1975년, 무슬림이 인구의 6.2%를 차지하자 노동이민의 입국을 금지시키도 했는데, 이미 상당수 유입된 외국인 근로자들은 가족을 프랑스로 불러들였고 이민자들의 수는 급증한다. 그러나 이들이 프랑스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하기는 녹록치 않았다. 세월은 흘러 결국 프랑스 이민 2세, 3세대는 프랑스의 ‘증오세대’로, 사회통합 실패의 길로 흘러가게 된다.

프랑스 이민정책의 맹점

프랑스는 강력한 동화주의 정책을 시행하여 자국의 정체성을 우선시하였다. 프랑스의 사회통합모델은 이민자들이 프랑스 사회에 철저히 동화되는 것을 전제로 한 사회통합이다. 공공장소에서 이슬람교 여성들의 '히잡' 착용 금지법을 통과시키고, 이민자들의 문화적, 사회적 특성을 포기하게 하는 등 다문화 사회의 갈등을 점화시켰다는 특징이 있다. 우선, 이민 1세대의 경우에는 외국에서 성장한 뒤 프랑스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를 이주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원주민들로부터 차별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체념하거나 수용하려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2세, 3세들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교육받고, 프랑스 국적을 갖고 있는 프랑스인들이다. 그럼에도 프랑스 사회에서 인종차별과 다양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당한다면 이들이 이를 수용하기에는 어려웠다.


갈등의 심화

방리유 사건

‘도시외곽지역’, 프랑스어로 ‘방리유(banlieue)’라고 불리는 지역은 가난, 폭력, 범죄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질적인 이 공간은 프랑스에서 얼마나 많은 이주민들이 소외된 채 살아가고 있는지를 상기시켜준다. 이들은 자신이 무슬림이라는 것과, 가난하고 소외된 교외지역에 산다는 사실 때문에 오랫동안 치안과 통합의 문제로 주목되어 왔다.. 불법 체류자가 많고 범죄율도 높은 까닭에 경찰의 무차별 불심검문도 흔해지자  젊은이들은 경찰에게 ‘범죄 용의자’로 취급받는 일이 흔해졌다. 방리유 젊은이들이 어린시절부터 증오와 적대감을  키울 수밖에 없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주민들이 불만을 폭동으로 표출하면서 프랑스 이민자 사회 문제는 전 유럽의 관심사가 되었고 이러한 이주민들에 대한 낙인이론은 2022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이번 대선 상대였던 장 마리 르펜의 정치적 기반이 되어 왔다.


11월 5일 스트라스부르에서 일어난 차량 방화

2005년 프랑스 소요사태(줄여서 말하면 파리 소요사태)는 프랑스와 인접 유럽 국가들에서 일어난 연쇄적인 차량 방화 사건 및 이민자 청소년들과 경찰 사이의 충돌이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프랑스의 교외 지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소요사태가 발생했으며, 자동차나 공공 건물에 불을 지르거나 경찰을 공격하는 형태를 띠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소요사태의 처음 20일 동안에 8973대의 차량이 불탔고 2888명이 체포되었으며 1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126명의 경찰이 부상당했다. 2005년 12월 10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참석한 각료회의에서 3개월의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발생

2005년 10월 27일 클리시수부아(Clichy-sous-bois)에서 세 십대 소년이 경찰의 추격을 피해 변전소에 들어갔다가 두 명이 감전되어 사망하고 한 명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최초의 폭력 사태는 두 소년이 경찰로부터 도망치다가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 클리시수부아 청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경찰과 정부는 경찰이 이들 소년을 추격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감전 사망 사고 이후 이어진 폭동에서 진압 경찰이 모스크에 최루제를 발사하고 당시 내무부 장관인 니콜라 사르코지(Nicolas Sarkozy)의 강경 발언이 이어지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사건 현황

매일 밤 주차된 차량, 운행 중인 버스, 창고, 보육원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방화와 기물 파괴 행위가 발생하고 있다. 한동안 클리시수부아가 위치한 센생드니주를 중심으로 파리 교외 지역에 사건이 집중되었으나 곧 프랑스 전국의 이민자 집중 지역들로 소요 사태가 확산되었다. 2005년 11월 5일 밤 최초로 파리 중심가 레퓌블리크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에서 차량 방화 사건이 발생하였다

원인

직접적 원인은 클리시수부아에서 감전사한 두 소년의 죽음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소외받고 차별받아 온 이민자 출신 교외 거주 청소년의 울분이 감전사 사건으로 인해 폭발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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