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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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연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1월 28일 (수) 15:48 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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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사대문[四大門]

요약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의 사방에 세운 성문으로, 남쪽의 숭례문(崇禮門)·북쪽의 숙정문(肅靖門)·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서쪽의 돈의문(敦義門)을 통칭 사대문이라 한다.

설립

조선 건국 초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수도인 한양을 지키기 위해 세운 성곽의 문이다. 한양의 동서남북에는 4개의 커다란 성문인 4대문(사대문,四大門)을 두었고, 4대문의 사이사이에는 작은 성문인 4소문(사소문,四小門)을 두었다.

4대문은 세워진 방위에 따라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북대문'으로 불리나, 정식 이름은 유교 사상의 인의예지(仁義禮智)에 근거를 두어 지어졌다.

동대문은 인(仁)을 일으키는 문이라 하여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의(義)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 하여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예(禮)를 숭상하는 문이라 하여 '숭례문(崇禮門)'이라 하였다. 그러나 북대문의 이름은 지(智)를 넣어 '숙지문'이라 하지 않고 청(淸)을 넣어서 '숙청문'이라고 하였으며, 이후 '숙정문(肅靖門)'이 되었다.

사대문

흥인지문

동대문.jpg

개요

  • 지정종목: 보물
  • 지정번호: 보물 1호
  •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88 (종로6가 69)
  • 크기: 정면 5칸, 측면 2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5년(1396) 도성 축조때 건립되었으나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역사

흥인지문.jpg

흥인지문은 일대의 지반이 낮아 땅을 돋운 뒤 건설하여야 해서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에도 공사중이었으며, 1398년(태조 7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때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1451년(문종 1년) 3월에는 도성을 고쳐 쌓은 뒤 기한이 남아, 흥인지문을 혜화문과 더불어 수리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본격적인 흥인지문 정비를 시작하여, 1453년(단종 1년) 5월에 완료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에는 발인 때 상여가 나가기가 쉽게 하기 위하여, 국장도감에서 건의한 대로 흥인지문의 박석을 파내려갔다.

1868년(고종 5년)에는 흥인지문이 크게 손상되었기에 의정부에서 그 수리를 요청하였고, 이듬해 3월에 중수를 끝냈다. 이 즈음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인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1907년(고종 44년) 3월에는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좌우측 성벽을 8칸씩 헐어 전차 선로를 부설하였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1999년에는 옹성이 붕괴되어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3억여원을 들여 보수하였으나, 옹성 아랫부분이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일어나 재시공을 결정하였다.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지하수위가 낮아지고 지반이 침하되었으며, 2002년 12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옹성을 해체하여 지반 보강 후 복원하였다. 2015년에는 문 북쪽의 도성과 연계하여 석재를 포장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관련 사건

2018년 3월 9일 새벽 1시 49분께 한 방화범이 서울 종로구 흥인지문의 잠긴 출입문 옆 벽면을 타고 몰래 들어가 2층 누각에서 미리 준비해간 종이박스에 불을 붙인 (공용건조물 방화 미수, 문화재 보호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숭례문의 악몽이 재현될 뻔했으나, 다행히 4분만에 조기 진화되어 담벼락이 조금 그을렸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구속후 초기 경찰수사에서 방화범이 밝힌 범행이유는 보험금을 받지 못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돈의문

서대문.jpg

개요

  • 유형: 유적
  • 성격: 성문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

돈의문(敦義門)은 서울에 세워진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이름은 '의(義)를 북돋는 문'이라는 뜻이다. 서대문(西大門)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이었으며,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문이었다.

1396년(태조 5년) 한양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던 때 처음 세워졌다. 1413년(태종 13년) 폐쇄되고 그 대신 그 북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출입케 하였다가,

1422년(세종 4년) 다시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수리하였다. 그 뒤 헐어진 것을 보수하여 1711년(숙종 37년)에 다시 지었으나, 1915년 전차가 들어서면서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역사

돈의문.jpg

돈의문은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는데, 축성 당시에는 사직동 고개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돈의문을 닫고 서전문(西箭門)을 설치하였는데, 이숙번의 건의로 인덕궁 앞 소동(小洞)에 세워졌다.

1422년(세종 4년) 2월에는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이 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이다. 백성들은 세종이 세운 돈의문을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돈의문의 성문과 성루가 낡자 1711년(숙종 37년)에 돈의문을 새로 지었다.

1915년 3월에는 돈의문을 헐고 도로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여, 경매 끝에 205원 50전에 '염덕기'가 목재를 낙찰받았으며 그 외의 귀중한 부속물은 총독부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그해 6월에 강제 철거가 완료되었다. 총독부가 처음에는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모두 헐기로 했으나,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헐지 않고 문 양쪽 성벽만 없애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고 돈의문만 철거했다.

2009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인근의 서대문 고가차도를 철거하고 2013년까지 돈의문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현재 돈의문 복원은 예산 및 원형 복원 등의 문제가 겹쳐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로 미뤄진 상태다.

돈의문은 서대문구에 소재하였으므로 그 구명(區名)을 서대문에서 따 왔지만,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 때문에 중구 관할 지역에 속한다. 현재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터' 라는 표지석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돈의문의 흔적인 현판이 소장되어 있다.

남대문

개요

역사

관련 사건

북대문

개요

역사

관련 사건

관련 영상

작품

기타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참고문헌

사진 출처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