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대문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윤소연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1월 28일 (수) 16:17 판 (북대문)
이동: 둘러보기, 검색


서울의 사대문[四大門]

요약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의 사방에 세운 성문으로, 남쪽의 숭례문(崇禮門)·북쪽의 숙정문(肅靖門)·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서쪽의 돈의문(敦義門)을 통칭 사대문이라 한다.

설립

조선 건국 초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수도인 한양을 지키기 위해 세운 성곽의 문이다. 한양의 동서남북에는 4개의 커다란 성문인 4대문(사대문,四大門)을 두었고, 4대문의 사이사이에는 작은 성문인 4소문(사소문,四小門)을 두었다.

4대문은 세워진 방위에 따라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북대문'으로 불리나, 정식 이름은 유교 사상의 인의예지(仁義禮智)에 근거를 두어 지어졌다.

동대문은 인(仁)을 일으키는 문이라 하여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의(義)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 하여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예(禮)를 숭상하는 문이라 하여 '숭례문(崇禮門)'이라 하였다. 그러나 북대문의 이름은 지(智)를 넣어 '숙지문'이라 하지 않고 청(淸)을 넣어서 '숙청문'이라고 하였으며, 이후 '숙정문(肅靖門)'이 되었다.

사대문

흥인지문

동대문.jpg

개요

  • 지정종목: 보물
  • 지정번호: 보물 1호
  •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88 (종로6가 69)
  • 크기: 정면 5칸, 측면 2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5년(1396) 도성 축조때 건립되었으나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역사

흥인지문.jpg

흥인지문은 일대의 지반이 낮아 땅을 돋운 뒤 건설하여야 해서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에도 공사중이었으며, 1398년(태조 7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때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1451년(문종 1년) 3월에는 도성을 고쳐 쌓은 뒤 기한이 남아, 흥인지문을 혜화문과 더불어 수리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본격적인 흥인지문 정비를 시작하여, 1453년(단종 1년) 5월에 완료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에는 발인 때 상여가 나가기가 쉽게 하기 위하여, 국장도감에서 건의한 대로 흥인지문의 박석을 파내려갔다.

1868년(고종 5년)에는 흥인지문이 크게 손상되었기에 의정부에서 그 수리를 요청하였고, 이듬해 3월에 중수를 끝냈다. 이 즈음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인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1907년(고종 44년) 3월에는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좌우측 성벽을 8칸씩 헐어 전차 선로를 부설하였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1999년에는 옹성이 붕괴되어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3억여원을 들여 보수하였으나, 옹성 아랫부분이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일어나 재시공을 결정하였다.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지하수위가 낮아지고 지반이 침하되었으며, 2002년 12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옹성을 해체하여 지반 보강 후 복원하였다. 2015년에는 문 북쪽의 도성과 연계하여 석재를 포장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관련 사건

2018년 3월 9일 새벽 1시 49분께 한 방화범이 서울 종로구 흥인지문의 잠긴 출입문 옆 벽면을 타고 몰래 들어가 2층 누각에서 미리 준비해간 종이박스에 불을 붙인 (공용건조물 방화 미수, 문화재 보호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숭례문의 악몽이 재현될 뻔했으나, 다행히 4분만에 조기 진화되어 담벼락이 조금 그을렸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구속후 초기 경찰수사에서 방화범이 밝힌 범행이유는 보험금을 받지 못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돈의문

서대문.jpg

개요

  • 유형: 유적
  • 성격: 성문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

돈의문(敦義門)은 서울에 세워진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이름은 '의(義)를 북돋는 문'이라는 뜻이다. 서대문(西大門)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이었으며,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문이었다.

1396년(태조 5년) 한양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던 때 처음 세워졌다. 1413년(태종 13년) 폐쇄되고 그 대신 그 북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출입케 하였다가,

1422년(세종 4년) 다시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수리하였다. 그 뒤 헐어진 것을 보수하여 1711년(숙종 37년)에 다시 지었으나, 1915년 전차가 들어서면서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역사

돈의문.jpg

돈의문은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는데, 축성 당시에는 사직동 고개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돈의문을 닫고 서전문(西箭門)을 설치하였는데, 이숙번의 건의로 인덕궁 앞 소동(小洞)에 세워졌다.

1422년(세종 4년) 2월에는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이 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이다. 백성들은 세종이 세운 돈의문을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돈의문의 성문과 성루가 낡자 1711년(숙종 37년)에 돈의문을 새로 지었다.

1915년 3월에는 돈의문을 헐고 도로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여, 경매 끝에 205원 50전에 '염덕기'가 목재를 낙찰받았으며 그 외의 귀중한 부속물은 총독부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그해 6월에 강제 철거가 완료되었다. 총독부가 처음에는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모두 헐기로 했으나,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헐지 않고 문 양쪽 성벽만 없애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고 돈의문만 철거했다.

2009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인근의 서대문 고가차도를 철거하고 2013년까지 돈의문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현재 돈의문 복원은 예산 및 원형 복원 등의 문제가 겹쳐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로 미뤄진 상태다.

돈의문은 서대문구에 소재하였으므로 그 구명(區名)을 서대문에서 따 왔지만,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 때문에 중구 관할 지역에 속한다. 현재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터' 라는 표지석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돈의문의 흔적인 현판이 소장되어 있다.




숭례문

숭례문.jpg

개요

  • 지정종목: 국보
  • 지정번호: 국보 제 1호
  • 지정일: 1962년 12월 20일
  •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29)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일명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하는데, 서울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고, 문화재청 숭례문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숭례문은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지만,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쯤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누각의 90%, 1층 누각의 10% 정도가 소실되었다. 이후 2010년 2월에 숭례문복구공사를 시작한 이래 2013년에 완공되어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역사

남대문.jpg

숭례문은 1396년(태조 5년) 축조된 서울도성의 정문으로, 1398년(태조 7) 2월에 준공되었다. 그 뒤 1448년(세종 29년) 개수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실시된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479년(성종 10년)에도 대대적인 중수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에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본 제국은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열고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열고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평양성 일대에 현존하는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도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승리한 것과 관련되는 유적이라 해서 고적으로 지정돼 보호받았다고 한다.

2003년부터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의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또한 1907년 일제에 의해 출입 금지된 숭례문이 2006년 3월 3일부터 이명박 서울시장에 의해 99년만에 일반에 개방이 결정되어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8년 2월 11일 방화로 인한 화재로 붕괴하였다. 5년에 걸친 복원공사로 2013년 4월 29일 복원에 완료하였고 5월 4일부로 개방하였지만, 같은해 10월 부실공사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관련 사건

  1. 1991년 8월에는 만취한 50대 남성이 훔친 승용차를 몰고 숭례문의 철제 출입문을 들이받았다.
  2. 1997년 2월에는 만취한 30대 남성이 일본인 관광객 2명과 함께 숭례문의 통제구역에 침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3.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경, 방화범 채종기(70, 경북칠곡)의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현장에 수십여대 소방차가 출동하여 진화작업을 펼쳤으나, 2월 11일 0시 40분 경에 건물 천장에서부터 화염이 일었고, 오전 1시쯤부터는 2층 누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4분 경, 불에 타지 않는 석축을 제외한 1, 2층 목조 누각이 대부분 전소하여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두 붕괴되었다. 숭례문의 구조상의 문제로, 지붕 밑에 있는 칸에 있던 불에 물이 닿지 않아 초기진압이 어려웠고, 결국 무참히 타버렸다. 초기 수사당국에서는 누전이나 합선에 의한 화재인지, 고의적인 방화에 의한 화재인지 의견이 엇갈리다가 화재 발생 후에도 숭례문의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누전사고는 아닌 것으로 보고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수사한 결과,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이미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한 전과가 있는 방화범인 채종기를 검거하였다. 하지만 600년 가까이 이어져오던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중 하나가 이미 소실된 후였고,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밝히고 복구작업을 벌여 현재 복구되어 개방되었다. 2008년 8월 15일에는 일반 시민들에게 숭례문 복구현장을 공개했다.

복구현장에서 숭례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석축 울타리 안쪽에서,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지하벙커 (깊이 2m, 너비 2m, 길이 3m 가량)가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이를 철거하기로 했다. 또한, 문화재청은 옛 성곽 자리를 그림으로도 복원하겠다고 밝히며 도로 위에 옛 성곽 자리를 표시했다.

문화재청에서는 국민적 정서를 감안하여 대한민국의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이 불타 소실된 자리에 숭례문의 잔해를 기초로 하여 숭례문과 최대한 유사하도록 형태를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여 2013년 5월 복구 준공식을 목표로 하여 2013년 4월 29일 공사 완료하였다. 화재로 무너진 숭례문 복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 이후 없어진 동쪽 성곽 53m와 서쪽 성곽 16m 구간이 각각 복원됐다. 동쪽 계단은 폭이 5m(종전 2.9m)로 늘어난다. 발굴 조사와 옛 자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반은 이전보다 30 ~ 50cm 낮아졌으며, 1층 마루는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바뀐다. 화재 직전 공장 제품이었던 지붕 기와는 전통 기와로 대체됐으며, 용마루 길이도 16.6m(종전 15.7m)로 늘어났다. 잡상은 1층이 7개로 하나 줄었으며, 2층은 9개로 같다.




숙정문

숙정문.jpg

개요

역사

파일:북대문.jpg

관련 사건

관련 영상

작품

기타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참고문헌

사진 출처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