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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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13일 (수) 22:50 판 (성북동 소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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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성북동은 성(城)의 북(北)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은 한양도성이니, 성북동은 한양도성이 만들어진 이후에 붙은 이름이다.

성북동은 아늑한 마을이었다. 백두대간은 힘차게 달려 내려와 그 일부가 한양의 백악산까지 이른다. 백악산에 이르기 직전 작은 두 봉우리 -구준봉과 응봉-에서 내려온 산자락이 감싸고 있는 마을이 또한 성북동이다. 그 산자락 사이로 흐르던 것이 성북천이었으니, 성북동은 한양과 가깝고, 물이 흐르고, 산이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성북동에 사람을 살게 한 것은 교통과 자연환경이었다. 도성의 바로 밖이라는 교통의 편리함, 산과 물이 어우러진 훌륭한 자연환경은 도성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조선후기의 어느 봄이나 성북동은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가득찼다.

성북동도 근대의 바람을 탔다. 사대문 밖에서 가장 교통이 편리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성북동에는 비교적 중산층으로 불릴만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곧 마을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일제강점 하의 어려운 시절에도 스스로 학교를 지어 자녀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했을 뿐 아니라, 식민지 당국을 상대로 상수도 부설, 버스시간 연장 등의 청원운동을 벌여 더 나은 삶의 공간을 만들고자 힘썼다.

여러 모로 살기 좋은 마을이니 문화예술인들도 모여들었다. 1930년대 초반에 이미 문인촌으로 불릴 만큼 많은 문인들이 성북동에 살았다. 카프의 중심인물이었던 김기진, 구인회의 중심인물인 이태준은 모두 한 동네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며 승려이기도 한 만해 한용운ㄴ도 이곳 성북동의 주민이었다. 간송 전형필은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을 성북동에 지었다. 그리고 만해와 간송과 모두 인연이 있는 또 한명의 독립운동가이자, 수집가인 위창 오세창 역시 성북동에 살며 이들과 교류했다. 문인과 독립운동가만 이곳에 산 것은 아니었다.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두 거인, 근원 김용준과 수화 김환기는 늙은 감나무가 열리는 마당이 있는 같은 집에서 연이어 살았다. 김환기는 성북동에 살던 또 다른 친구인 시인 김광섭의 시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성북동의 마을 이름

'성북동' 동명의 유래

  1. 조선후기 영조 때 도성수비를 위한 어영청(御營廳)의 성북둔(城北屯)이 도성 북쪽에 설치되어 있던 데서 유래
  2. 단순하게는 '한양도성의 북쪽'이라는 뜻의 마을 이름

행정구역의 변천

  1. 조선초기
    • 한성부 동부 숭신방
  2. 조선후기
    • 한성부 동부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
  3. 조선말기
    •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1895)
  4. 일제강점기
    •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1911)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1914)
    • 경성부 성북정(1936)
    • 경성부 종로구 성북정(1943)
    •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1944)
  5. 8.15해방~현재
    • 서울특별자유시 동대문구 성북동(1946)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1949)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성북동

일제시기 발간된 유명한 잡지였던 『삼천리』에는 성북동에 관한 몇 가지 기사가 실려 있다. 1933년 10월에 발간된 잡지에 따르면 서울 부근은 모두 경치가 아름다운데 그 중에서도 성북리는 산수의 경치, 공기의 청정으로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경성부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고 있는데, 특히 성북리는 "한적한 근교이며 지형과 경치가 아름다워 예술을 벗 삼는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성북리는 하나의 문인촌(文人村)인 것 같다고 했다. 1933년 현재 성북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문인가는 시인이자 작사가인 김억, 여류문인 김일엽, 평론가이자 소설가였던 김기진, 홍효민, 단편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이태준,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종린 등이 있었다.

성북동의 자연환경

북악산 줄기

  1. 북악산
    • 종로구와 성북구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청와대 뒤편 주봉에서 동쪽 방면으로 뻗어내린 산자락이 성북동의 서~북~동쪽을 둘러싸고 있음
    • 서울의 주산으로 '북악'이란 이름은 한양도성의 북쪽 산인 데서 유래했으며 공극산·면악·백악이라고도 함(높이 342m)
    • 2009년 '서울 백악산 일원'이라는 명칭으로 명승 제 67호 지정

성북천 주변

조선인 부호들의 별장

경성부 안팎 부호들의 별장

  • 조선시대 서울 근교의 별장(별서정원) 대부분이 양반 세도가나 고위 관료들의 소유였다고 한다면 일제강점기에는 지주나 대금업자 등 새로운 시대 환경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서울의 신흥 부호들이 근교의 별장들을 소유
  • 종래의 조선식 기와집뿐 아니라, 양식, 일본식, 절충 양식 등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지은 별장 등장
    1. 서울 근방 부호들의 별장지대
      • 죽첨정(竹添町) 3정목(현 서대문구 충정로3가)의 고태(高台)
      • 장충단(奬忠壇) 너머 학구(鶴丘) 일대
      • 용산 너머 명수태(明水台) 일대
      • 성북동 일대

성북동, 조선인 부호들의 별장 지대

  • 1935년, 성북동 내 개인 별장 14개소 확인
    1. 백인기의 별장
    2. 백상규의 2층 양옥 별장
    3. 한양호의 신식 별장
    4. 간송 전형필의 별장
    5. 대금없자 임종상의 별장
    6. 지주 이종석의 별장
    7. 기타 성북동의 별장
      • 황금정에서 약종상하는 이유선의 별장
      • 해동은행 김계수의 별장 : 이강공 별저 올라가는 길목에 있었다고 알려짐
      • 서울 부자 김동규의 별장
      • 의친왕 이강의 별저 : 순조선식 늙은 건물(현 성락원)


성북동 소개 영상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성북동 문인촌 A는 B의 성격을 지니기도 했다.

참고 문헌

  • 성북구청·성북문화원,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성북구청·성북문화원, 2016.
  • 성북문화원, 『성북동-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성북문화원, 2015.
  • 「城北洞의 文人村, 『삼천리』5권 10호, 1933.10.1

삼천리.jpg

작성자

김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