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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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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부터 1422년까지 부왕인 태종이 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부왕 태종이 홍서한 후 1422년 부터 144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442년부터 1450년 승하할 때까지 첫째 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세종 치세의 역사적 의의'''===
 
==='''세종 치세의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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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 기반 위에 세종을 보필한 훌륭한 신화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보필을 박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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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과 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생애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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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봉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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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李祹)는 1397년 음력 4월 10일 당시 정안군이던 태종과 민제의 딸 원경왕후민씨의 칠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및 세명의 요절한 친형이 있었고,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뒤에 친 여동생 정선공주와 남동생 성녕대군 종이 태어난다. 처음 그의 이름은 막동으로 지었다가 뒤에 이름을 도(祹)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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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정종 2) 2월 아버지 정안대군 이방원이 왕세자가 되면서 그는 잠정적 왕위계승권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부왕의 즉위 후 1408년 12살에 충녕군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와 변계량에게 수학하였다. 하루는 눈병이 났음에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아 부왕 태종이 강제로 책을 빼앗아서 숨겼다고 한다.
  
==='''출생과 봉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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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는 정몽주의 문하생인 성리학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부왕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왕이 숨겨둔 책을 찾아내어 독서를 계속하였다.
 
==='''대군 진봉, 그리고 형들과의 경쟁'''===
 
==='''대군 진봉, 그리고 형들과의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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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년 16살에 둘째 형 효령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대광보국 충녕대군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특히 동생이며 부왕 태종의 넷째 아들인 병약한 성녕대군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그 우애가 유난히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군은 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채 1418년 음력 2월 4일 14세로 일찍 죽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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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이제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이제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세자 책봉과 즉위'''===
 
==='''세자 책봉과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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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년에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인해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 해 6월 22살의 그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제를 양녕대군으로 강봉하였다.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이제는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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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 8월초 8일 태종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 주고 연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녕대군은 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이틀 뒤인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세종의 업적'''==
 
=='''세종의 업적'''==
 
==='''유교정치의 기틀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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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후반'''==
 
=='''생애 후반'''==
 
==='''가정의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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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그의 친동생인 성녕대군이 요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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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초반에 장녀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후반엔 광평대군이 갑작스럽게 죽은 뒤, 평원대군도 잇따라 요절을 하게되어,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등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마저 승하하면서 그는 생애 후반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궁궐 내에 법당을 조성하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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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중풍, 요로결석, 노안)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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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가 즉위한 직후부터 삼촌 회안대군 처형과 사촌형 의령군 이맹종을 처형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1422년에는 의령군 이맹종을 홍주에서 여주로 옮겼다가 이맹종 집안의 재산을 회안대군의 딸들에게 나누어주었고, 1422년 4월 사헌부대사헌 성엄 등은 이숙번, 양녕대군, 김한로, 의령군 이맹종 등의 처벌을 상소하였다. 이후 계속 의령군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올려져 결국 1423년(세종 5)에 세종은 의령군에게 자진을 명하였다.
  
 
=='''일화'''==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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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은 세종이 충녕대군 이었던 시절에 지나칠 정도로 독서만 하여, 태종이 “세자 방의 모든 책을 치우고 쉬게 하라”고 하자 매우 상심하다가 우연히 병풍 틈에서 발견한 ‘구소수간(歐蘇手簡)’을 기뻐하며 닳도록 읽는다. 세종은 태종이 모든 책을 돌려줄 때까지 그 책을 1,000번 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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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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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으며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비공식 기록에 의하면 세종은 젊은 시절에는 비만하여 몸집이 거대하였고 둔한 모습이었으나 노년에는 비쩍 말랐을 것으로 추측한다.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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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아이를 많이 낳을 정도로 후궁을 많이 거들어 두었고, 매우 정력가이다. 정력가이기에 성병 중 하나인 임질에 걸려서 일평생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 당뇨병)·풍질(風疾) 등을 평생동안 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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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세종실록 92권 (1441, 세종 23년) 에서의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등의 내용으로 세종이 시각 쪽에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고, 재위 32년 중 20여 년간은 시각에 장애를 느꼈으며 승하(훙서) 하기 전 8년 동안은 거의 앞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정사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가계'''==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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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의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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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 조선 추존왕 환조(1315~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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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모 : 조선 추존왕비 의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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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 조선 제1대 국왕 태조(1335~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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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모 : 신의왕후 한씨(1337~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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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조모: 신덕왕후 강씨(1356~1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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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 조선 제3대 국왕 태종 (1367~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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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후: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1365~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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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누나: 정순공주(貞順公主, 1385~1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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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자형: 청평부원군 이백강(淸平府院君 李伯剛, 1381~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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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누나: 경정공주(慶貞公主, 1387~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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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자형: 평양부원군 조대림(平壤府院君 趙大臨, 1387~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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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누나: 경안공주(慶安公主, 1393~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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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자형: 길창군 권규(吉昌君 權跬, 139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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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형: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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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형: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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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 정선공주(貞善公主, 1404~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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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제: 의산군 남휘(宜山君 南暉,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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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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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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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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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공주(貞昭公主) -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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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 향(王世子 珦) → 조선 제5대 국왕 문종(文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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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공주(貞懿公主) - 하가(下嫁)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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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유(首陽大君 瑈) → 조선 제7대 국왕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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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 용(安平大君 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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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대군 구(臨瀛大君 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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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평대군 여(廣平大君 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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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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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대군 임(平原大君 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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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응대군 염(永膺大君 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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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영빈 강씨(令嬪 姜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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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군 영(和義君 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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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신빈 김씨(愼嬪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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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군 증(桂陽君 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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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창군 공(義昌君 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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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군 침(密城君 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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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현군 연(翼峴君 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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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군 당(寧海君 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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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군 거(潭陽君 璖), 요절(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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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주(翁主) : 일찍죽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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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주(翁主) : 일찍죽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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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민정혜빈 양씨(愍貞惠嬪 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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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군 어(漢南君 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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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춘군 현(壽春君 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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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군 전(永豊君 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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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숙빈 이씨(淑嬪 李氏)[가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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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옹주(貞安翁主) - 하가(下嫁)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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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귀인 박씨(貴人 朴氏) 밀양박씨 박강생(朴剛生)의 딸 [가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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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귀인 최씨(貴人 崔氏)[가족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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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숙의 조씨(淑儀 曹氏)[가족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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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소용 홍씨(昭容 洪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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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상침 송씨(尙寢 宋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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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옹주(貞顯翁主) - 하가(下嫁) 좌익공신(佐翼功臣)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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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사기 차씨(司記 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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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주(翁主) : 요절[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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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상식 황씨(尙食 黃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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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전찬 박씨(典贊 朴氏)
 
=='''상훈과 추모'''==
 
=='''상훈과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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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능호는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왕대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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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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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C%84%B8%EC%A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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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84%B8%EC%A2%85&ridx=0&tot=550

2018년 12월 13일 (목) 03:39 판

개설

치세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부터 1422년까지 부왕인 태종이 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부왕 태종이 홍서한 후 1422년 부터 144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442년부터 1450년 승하할 때까지 첫째 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세종 치세의 역사적 의의

세종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 기반 위에 세종을 보필한 훌륭한 신화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보필을 박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과 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생애 초기

출생과 봉작

이도(李祹)는 1397년 음력 4월 10일 당시 정안군이던 태종과 민제의 딸 원경왕후민씨의 칠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및 세명의 요절한 친형이 있었고,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뒤에 친 여동생 정선공주와 남동생 성녕대군 종이 태어난다. 처음 그의 이름은 막동으로 지었다가 뒤에 이름을 도(祹)로 고쳤다.

1400년(정종 2) 2월 아버지 정안대군 이방원이 왕세자가 되면서 그는 잠정적 왕위계승권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부왕의 즉위 후 1408년 12살에 충녕군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와 변계량에게 수학하였다. 하루는 눈병이 났음에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아 부왕 태종이 강제로 책을 빼앗아서 숨겼다고 한다.

그 뒤에는 정몽주의 문하생인 성리학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부왕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왕이 숨겨둔 책을 찾아내어 독서를 계속하였다.

대군 진봉, 그리고 형들과의 경쟁

1412년 16살에 둘째 형 효령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대광보국 충녕대군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특히 동생이며 부왕 태종의 넷째 아들인 병약한 성녕대군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그 우애가 유난히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군은 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채 1418년 음력 2월 4일 14세로 일찍 죽고 만다.

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이제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이제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세자 책봉과 즉위

1418년에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인해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 해 6월 22살의 그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제를 양녕대군으로 강봉하였다.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이제는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 8월초 8일 태종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 주고 연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녕대군은 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이틀 뒤인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세종의 업적

유교정치의 기틀 마련

편찬사업의 융성

훈민정음의 창제

과학기술의 발전과 기술서적의 편찬

법전의 장비

불교에 대한 시책

생애 후반

가정의 불행

어려서 그의 친동생인 성녕대군이 요절하였다.

재위 초반에 장녀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후반엔 광평대군이 갑작스럽게 죽은 뒤, 평원대군도 잇따라 요절을 하게되어,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등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마저 승하하면서 그는 생애 후반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궁궐 내에 법당을 조성하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중풍, 요로결석, 노안)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한편 그가 즉위한 직후부터 삼촌 회안대군 처형과 사촌형 의령군 이맹종을 처형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1422년에는 의령군 이맹종을 홍주에서 여주로 옮겼다가 이맹종 집안의 재산을 회안대군의 딸들에게 나누어주었고, 1422년 4월 사헌부대사헌 성엄 등은 이숙번, 양녕대군, 김한로, 의령군 이맹종 등의 처벌을 상소하였다. 이후 계속 의령군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올려져 결국 1423년(세종 5)에 세종은 의령군에게 자진을 명하였다.

일화

조선 세종은 세종이 충녕대군 이었던 시절에 지나칠 정도로 독서만 하여, 태종이 “세자 방의 모든 책을 치우고 쉬게 하라”고 하자 매우 상심하다가 우연히 병풍 틈에서 발견한 ‘구소수간(歐蘇手簡)’을 기뻐하며 닳도록 읽는다. 세종은 태종이 모든 책을 돌려줄 때까지 그 책을 1,000번 읽었다고 한다.

건강

세종은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으며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비공식 기록에 의하면 세종은 젊은 시절에는 비만하여 몸집이 거대하였고 둔한 모습이었으나 노년에는 비쩍 말랐을 것으로 추측한다.

세종은 아이를 많이 낳을 정도로 후궁을 많이 거들어 두었고, 매우 정력가이다. 정력가이기에 성병 중 하나인 임질에 걸려서 일평생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 당뇨병)·풍질(風疾) 등을 평생동안 앓았다고 한다.

세종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세종실록 92권 (1441, 세종 23년) 에서의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등의 내용으로 세종이 시각 쪽에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고, 재위 32년 중 20여 년간은 시각에 장애를 느꼈으며 승하(훙서) 하기 전 8년 동안은 거의 앞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정사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가계

조선 세종의 조상

  • 증조부 : 조선 추존왕 환조(1315~1361)
  • 증조모 : 조선 추존왕비 의혜왕후
  • 조부 : 조선 제1대 국왕 태조(1335~1408)
  • 조모 : 신의왕후 한씨(1337~1391)
  • 계조모: 신덕왕후 강씨(1356~1396)
  • 부왕: 조선 제3대 국왕 태종 (1367~1422)
  • 모후: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1365~1420)
  • 첫째누나: 정순공주(貞順公主, 1385~1460)
  • 첫째자형: 청평부원군 이백강(淸平府院君 李伯剛, 1381~1451)
  • 둘째누나: 경정공주(慶貞公主, 1387~1455)
  • 둘째자형: 평양부원군 조대림(平壤府院君 趙大臨, 1387~1430)
  • 셋째누나: 경안공주(慶安公主, 1393~1415)
  • 셋째자형: 길창군 권규(吉昌君 權跬, 1393~1421)
  • 첫째형: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 둘째형: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
  • 여동생: 정선공주(貞善公主, 1404~1424)
  • 매제: 의산군 남휘(宜山君 南暉, ?~1454)
  • 남동생: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1418)

세종

  • 왕비 :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 정소공주(貞昭公主) - 요절
    • 왕세자 향(王世子 珦) → 조선 제5대 국왕 문종(文宗)
    • 정의공주(貞懿公主) - 하가(下嫁)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
    •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瑈) → 조선 제7대 국왕 세조
    • 안평대군 용(安平大君 瑢)
    • 임영대군 구(臨瀛大君 璆)
    • 광평대군 여(廣平大君 璵)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
    • 평원대군 임(平原大君 琳)
    • 영응대군 염(永膺大君 琰)
  • 후궁 : 영빈 강씨(令嬪 姜氏)
    • 화의군 영(和義君 瓔)
  • 후궁 : 신빈 김씨(愼嬪 金氏)
    • 계양군 증(桂陽君 璔)
    • 의창군 공(義昌君 玒)
    • 밀성군 침(密城君 琛)
    • 익현군 연(翼峴君 璭)
    • 영해군 당(寧海君 瑭)
    • 담양군 거(潭陽君 璖), 요절(12세)
    • 옹주(翁主) : 일찍죽음[12]
    • 옹주(翁主) : 일찍죽음[12]
  • 후궁 : 민정혜빈 양씨(愍貞惠嬪 楊氏)
    • 한남군 어(漢南君 𤥽)
    • 수춘군 현(壽春君 玹)
    • 영풍군 전(永豊君 瑔)
  • 후궁 : 숙빈 이씨(淑嬪 李氏)[가족 1]
    • 정안옹주(貞安翁主) - 하가(下嫁)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
  • 후궁 : 귀인 박씨(貴人 朴氏) 밀양박씨 박강생(朴剛生)의 딸 [가족 2]
  • 후궁 : 귀인 최씨(貴人 崔氏)[가족 3]
  • 후궁 : 숙의 조씨(淑儀 曹氏)[가족 4]
  • 후궁 : 소용 홍씨(昭容 洪氏)
  • 후궁 : 상침 송씨(尙寢 宋氏)
    • 정현옹주(貞顯翁主) - 하가(下嫁) 좌익공신(佐翼功臣)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
  • 후궁 : 사기 차씨(司記 車氏)
    • 옹주(翁主) : 요절[13]
  • 후궁 : 상식 황씨(尙食 黃氏)
  • 후궁 : 전찬 박씨(典贊 朴氏)

상훈과 추모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능호는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왕대리)에 있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C%84%B8%EC%A2%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84%B8%EC%A2%85&ridx=0&tot=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