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강서연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15일 (수) 01:00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계열의 통합 움직임은 1920년대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이어졌다. 1927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손을 잡고 당파를 초월한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기회주의를 일제 부인한다.’는 강령으로 타협적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완전독립을 목표로 하였다. 신간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원산노동총파업과 같은 학생·노동운동을 지원하고 민중대회운동, 야학운동 등을 주도하여 일제강점기 최대 항일사회운동 단체로서 활동하였다. 
  -독립기념관 공식 소개문-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서울에서 창립한 민족협동전선이다.국내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이다. 1920년대∼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두 흐름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만∼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결성 배경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는 일간지인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잡지인『개벽』 등 민족의 언론기관이 생겼고 사회주의가 유입되어 유력한 운동세력을 이루었다. 또한 농민, 청년, 여성, 노동자 단체 등 대중운동조직이 결성 되어 민족운동이 활성화 되었다. 하지만 일체의 독립운동을 허하지 않는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정세변동으로 국내외 운동세력은 곧 곤란에 빠졌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친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주의가 빛을 바래면서 변혁적 국면도 퇴조하였다. 3‧1 운동의 성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도 내분과 대중 기반 상실로 민족운동을 지도하지 못하였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 때문에 독립을 표방한 대중조직을 만들거나 3‧1 운동처럼 직접적 정치투쟁을 하거나 비합법적 정치조직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1925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결성과 동시에 와해되다시피 했고 1926년 6·10만세운동 후 대대적인 검속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하여 민족운동세력은 새로운 방법론과 운동조직 결성을 모색하였다. 한편 새롭게 전개되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정세 변화는 민족운동 세력의 대응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6년 2월부터 국민당 정부에 의해 단행된 북벌(北伐)은 조선 정세에 하나의 변수로 작용하였다. 신간회가 결성될 즈음에 북벌이 완성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북벌은 만주와 몽고 지역에 대한 ‘일본의 특수이익’에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즉 만주의 정세변화는 조선의 운동세력에게 곧바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정세변화는 조선 정세변화에 보다 직접적이었다. 일본은 이때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를 경유하고 있었다. 불완전하게나마 정당정치가 확립되었고 1925년 3월에는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유권자 수가 300만 명에서 1,200만 명으로 일거에 늘어났다. 보통선거 실시를 앞두고 일본사회주의 세력과 노동자 농민 단체들은 의회 진출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의회 진출로 운동 방향을 전환하고 ‘무산(無産)정당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운동세력은 일본과 중국의 정세변화를 예의주시하였다. 민족운동 세력은 국제정세 변동에 의해 일제의 조선정책이 이완된다면 생길지도 모를 정치적 공간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3‧1 운동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신간회 결성에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3‧1 운동은 문화통치로 지배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냈고 독립국가의 국가 형태를 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로의 이끈 정치적 진전과 반일민족주의의 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3‧1 운동으로 독립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3‧1 운동은 자연발생성과 민족운동을 지도할 기관이 없었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3‧1 운동의 성과와 한계 속에서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은 전 민족적이고 합법적인 정치운동 단체를 만들 것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신간회로 결실을 맺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간회 결성의 직접적 계기는 1926년 최린(崔麟)과 천도교 신파로 대변되는 자치운동세력의 대두와 그들의 활동에 있다. 천도교 신파의 최린과 『동아일보』의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등은 1925년 이래 수차례 회합하여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자치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1926년 후반 극비리에 자치운동단체 조직에 착수하였고 사회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은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신간회 결성을 자치운동에 대한 대응이라는 수동적인 차원의 움직임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간회는 1920년대 초반 이래 민족운동세력이 모색해온 민족운동 노선과 활동이 중국혁명의 진전, 일본 국내 정세의 변화와 맞물려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1920년대 국내 민족 운동의 흐름과 신간회의 성립

신간회 배경.jpg

연원 및 변천

  •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자극받아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해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조직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합법적인 결사로서 항상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신간회의 성립 요인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24년 전후로 널리 퍼진 사회주의사상에 압도된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대표적인 기관이 만들어져 운동을 주도해 주기를 바랐다.
  • 둘째, 국내 사회주의 진영은 6·10만세를 고비로 활동이 점차 퇴보하자, 다시 한 번 일어설 계기를 마련키 위해 민족주의 진영에게 좌우 합작으로 민족 유일당을 성립하자고 제의하였다.
  • 셋째, 일제는 민족·사회주의 진영의 동태 파악과 계보 활동을 예의 추적, 구금하기 위해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가장된 차원에서 이를 허가해 주었다. 발기인은 신석우(申錫雨)·이상재(李商在)·안재홍(安在鴻) 등 조선일보사계가 중심이 된 34명이었다.
  • 규약은 25개조로 되어 있는데, 회의 명칭과 사무실의 설치 등을 명기하였다. 활동 강령은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이었다. 그 뒤 신간회는 비슷한 목적으로 성립된 민흥회(民興會)의 명제세(明濟世) 등과 통합을 추진, 이상재와 권동진(權東鎭)을 정·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 간사는 35명을 선출하기로 하고 권동진 등 11명을 위원으로 뽑았다. 창립총회에서 35인을 선출해 간사회를 소집, 총무·재무·출판·정치문화·조사연구·조직·선전의 7개 부서를 두었으며, 사무실은 이갑수(李甲洙)의 집을 이용하였다. 창립 당시 중앙 본부의 회장단을 민족주의 진영에서 독점, 사회·공산주의계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 1927년 3월 회장 이상재가 죽자 부회장 권동진이 그 뒤를 이어 통수 체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간회에서는 민족,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국내외에 지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먼저 일본 동경에 지회를 설치하여 지회장에 조헌영(趙憲泳)을 임명하였다.
  • 7월 10일에는 서울 지회를 설치, 지회장에 한용운(韓龍雲)을 임명하였다. 이와 같이 활발히 지회를 두어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기하 급수적으로 조직이 커지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서서히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해, 한번도 대규모의 전체 대회를 승인하지 않았다.
  • 이에 본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전국복대표자대회(全國複代表者大會)를 소집하여 전체 대회를 대행하였다. 1929년 7월 1일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그 동안 기선을 제압당했던 사회·공산주의 진영에서 회칙 개정을 요구하며 대거 참여하였다.

그 골자는 간사제를 폐지하고, 대신 집행위원제로 중앙의 권한을 학대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허헌(許憲)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좌익계의 중앙집행위원 45명과 중앙검사위원 10여 명이 선출되었다.

  • 그러나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趙炳玉)이 허헌 위원장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광주·목포 등의 지회가 여기에 참여하였다.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투쟁 목표는 뚜렷했는데, 이는 구호와 실천 강령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 즉,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나며 타협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을 먼저 천명한 뒤, 언론·집회·결사·출판 등의 자유를 쟁취할 것과 청소년·부인 형평 운동을 지원할 것도 아울러 투쟁의 방향으로 삼았다.
  • 뿐만 아니라 파벌·족보주의의 배격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기타 이민을 강력히 반대하며 재만 동포의 구제도 역설하였다. 근검 절약과 민족혼을 되찾아 우리의 얼이 건재하다는 걸 국내외에 과시하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함과 동시에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하였으나 일제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에 이 운동을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대, 파급시키기 위해, 광주에 다녀온 김병로(金炳魯)의 건의에 따라 서울에서 광주실정보고민중대회를 열고 그 부당성을 규탄하기로 하였다.
  • 1929년 12월 13일을 개최일로 잡고, 권동진·한용운·조병옥·송진우(宋鎭禹)·홍명희(洪命熹)·이관용(李灌鎔)·김항규(金恒奎)·주요한(朱耀翰)·이원혁(李源赫) 등 관계자가 이관용의 집에 모여 민중선언서를 발표하고 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 일본 경찰은 민중대회 중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병옥·김무삼(金茂森, 일명 金東駿)·권동진 등 44명과 근우회(槿友會) 간부 등 40명을 연행·구속하였다. 그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0년 2월 석방되었다. 김병로는 즉시 석방되어 신간회 재건운동에 힘써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 그러나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 간의 갈등·대립으로 분란이 계속되던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 창립된 지 만 4년 만에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