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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사 강 엘리자베트는 가르침을 끝낸 다음에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이제껏 쾌활한 아이들과 마주 유쾌히 지낸 그는 찜찜하고 갑갑한 자기 방에 돌아와서는 무한한 적막을 깨달았다.
 
가정교사 강 엘리자베트는 가르침을 끝낸 다음에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이제껏 쾌활한 아이들과 마주 유쾌히 지낸 그는 찜찜하고 갑갑한 자기 방에 돌아와서는 무한한 적막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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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만 지르고, 동무들이 ‘왜 가니?’ ‘더 놀다 가렴’ 등 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팔과 궁둥이를 저으면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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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봄의 저녁빛은 따슷하였다. 도회의 저녁은 더 번잡하였다. 시멘트 인도는 무수히 통행하는 사람의 발로 인하여 처르럭처르럭 때가닥때가닥 하는 소리를 시끄럽도록 내면서도 평안히 누워 있었다. 어떤 때는 사람의 위를 짧게 비추었다, 사람이 다 통과한 후에는 도로 길게 비추었다 하는, 자기와 함께 나아가는 자기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엘리자베트는 본능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늦은 봄의 저녁빛은 따슷하였다. 도회의 저녁은 더 번잡하였다. 시멘트 인도는 무수히 통행하는 사람의 발로 인하여 처르럭처르럭 때가닥때가닥 하는 소리를 시끄럽도록 내면서도 평안히 누워 있었다. 어떤 때는 사람의 위를 짧게 비추었다, 사람이 다 통과한 후에는 도로 길게 비추었다 하는, 자기와 함께 나아가는 자기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엘리자베트는 본능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2019년 6월 3일 (월) 10:52 판


약한 자의 슬픔

개요

김동인의 처녀작이다. 1919년 2월에서 3월에 걸쳐 ≪창조 創造≫ 1·2호에 발표되었다.

줄거리

여학교에 다니는 강엘니자벳트는 K 남작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가 그에게 정조를 빼앗긴다. 그 후 그녀는 K 남작에게 애정을 느끼고 둘은 육체적 관계를 지속한다. 그러나 엘니자벳트가 임신을 하자 K 남작은 그녀를 집에서 쫓아낸다. 배신감을 느낀 엘니자벳트는 정조유린에 대한 배상 재판을 청구하나 재판에서 패하고 뱃속의 아이까지 유산하고 만다. 엘니자벳트는 이러한 시련이 자신의 약함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닫고 사랑을 통해 강한 자가 될 것을 결심한다.

전문

1

가정교사 강 엘리자베트는 가르침을 끝낸 다음에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이제껏 쾌활한 아이들과 마주 유쾌히 지낸 그는 찜찜하고 갑갑한 자기 방에 돌아와서는 무한한 적막을 깨달았다.

‘오늘은 왜 이리 갑갑한고? 마음이 왜 이리 두근거리는고? 마치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아 있는 것 같군. 어찌할꼬. 어디 갈까. 말까, 아. 혜숙이한테나 가보자. 이즈음 며칠 가보지도 못하였는데.’

그의 머리에 이 생각이 나자, 그는 갑자기 갑갑하던 것이 더 심하여지고 아무래도 혜숙이 한테 가보여야 될 것같이 생각된다.

"아무래도 가보여야겠다.“

그는 중얼거리고 외출의를 갈아입었다.

‘갈까? 그만둘까?’

그는 생각이 정키 전에 문 밖에 나섰다. 여학생간에 유행하는 보법(步法)으로 팔과 궁둥이를 전후좌우로 저으면서 엘리자베트는 길로 나섰다. 그는 파라솔을 받은 후에 손수건을 코에 대어서 쏘는 듯한 콜타르 내음새를 막으면서 N통, K정 등을 지나서 혜숙의 집에 이르렀다. 그리 부자라 할 수는 없지마는, 그래도 경성 중류민의 열에는 드는 혜숙의 집은 굉대(宏大)하지는 못하지만 쑬쑬하고 정하기는 하였다. 그 집의 방의 배치를 익히 아는 엘리자베트는 들어서면서 파라솔을 접어서 마루 한편 끝에 놓은 후에,

"너무 갑갑해서 놀러 왔다 얘.“

하면서 혜숙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들어서면서, 혜숙이가 동모(同某) S와 무슨 이야기를 열심으로 하다가 자기 온 것을 알고 뚝 그치는 것을 알았다.

‘S는 원, 무엇 하러 왔노.’

그는 이유 없는 질투가 마음에서 끓어 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흥, 혜숙이는 S로 인하여 나한테 놀러도 안 오는구만. 너희끼리만 잘들 놀아라.’

혜숙이가 한 번도 자기게 놀러 와 본 때가 없으되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아, 엘리자베트 왔니. 우린 이제껏 네 이야기 하댔지. 그새 왜 안 왔니?“

혜숙이와 S는 동시에 일어나면서, 혜숙이는 엘리자베트의 왼손, S는 바른손을 잡고 주좌(主座)에 끌어다 앉히었다. 엘리자베트는, 아직 십구 세의 소녀이지만 재주와 용자(容姿)로 모든 동창들에게 존경과 일종의 시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재주로 인하여 아직 통학중이지만 K남작의 집에 유(留)하면서 오후에는 그 집 아이들에게 학과의 복습을 시키고 있었다.

"내 이야기라니 무슨? 내 숭들만 실컷 보고 있었니?“

엘리자베트는, 앉히는 자리에 앉으면서 억지로 성난 것을 감추고 농담 비슷하니 물었다. 혜숙과 S는 의논하였던 것같이 잠깐 서로 낯을 향하였다가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입을 비죽하니 하고 머리를 돌이켰다.

"내 이야기라니 무슨?" "네 이야기라니. 저― 그만두자.“

혜숙이가 감춰 두자 엘리자베트는 더 듣고 싶었다. 그는 차차 노기를 외면에 나타내게 되었다.

"내 이야기라니 무엇이야 얘? 안 가르쳐 주면 난 가겠다." "네 이야기라니. 저―“

혜숙이는 아까와 같은 말을 한 후에 S와 또 한번 마주 향하여 보았다.

"그럼 난 간다.“

하고 엘리자베트는 일어서려 하였다.

"얘, 가르쳐 줄라. 참말은 네 이야기가 아니고 저-―-- 이환(利煥) 씨 이야기.“

말이 끝난 뒤에 혜숙이는 또 한번 S와 낯을 향하였다. 혜숙의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노기와 부끄러움과 모욕을 당했다는 감을 함께 머금고 낯을 붉히고 머리를 숙였다. 엘리자베트가 매일 통학할 때에 N통 꺾어진 길에서 H의숙(義塾) 제모를 쓴 어떤 청년과 만나게 되었다. 만나기 시작한 지 닷새에 좀 정답게 생각되고, 열흘에 그를 만나지 못하면 섭섭하게 생각되고, 이십 일에 연애라 하는 것을 자각하고, 일 삭 만에 그 청년의 이름을 탐지하였다. ‘그도 나를 생각하겠지’ 하는 생각과 ‘웬걸, 내게는 주의도 안 하더라’ 하는 생각이 그 후부터는 항상 그의 마음속에서 쟁투하고 있었다. 연애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그렇거니와 엘리자베트도 연애―--- 짝사랑〔片戀〕이던-―--를 안 후부터는 벗들과 함께 있을 때는 아뭏지도 않지만, 혼자 있을 때는 염세의 생각과 희열의 생각이 함께 마음속에서 발하여 공연히 심장을 뛰놀리며 일어섰다, 앉았다,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일도 없는데 이환이와 만나게 되는 길에 가보았다, 이와 같이 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무게도 통사정할 사람이 없는 엘리자베트는 혜숙에게 이 말을 다 고백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의 비밀을 혜숙이는 S에게 알게 하였다 할 때는 그는 성이 났다. 처녀가 학생에게 사랑을 한다 하는 것이 그에게는 부끄러웠다. 둘―---혜숙과 S―---이서 내 숭을 실컷 보았겠거니 할 때에 그는 모욕을 당했다 생각하였다. 혜숙과 S가 서로 낯을 보고 웃을 때에 이 생각이 더 심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밀을 혜숙에게 고백하였다 할 때에, 엘리자베트는 자기에게 대하여서도 성을 안 낼 수가 없었다.

‘이껀 자기를 믿고 통사정을 하였더니 이런 말을 광고같이 떠들춘단 말인가. 이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고? 아, 부모가 살아 계시면…….’

살아 있을 때는, 자기를 압박하는 것으로 유일의 오락을 삼던 부모를 빨리 죽기를 기다리던 그도, 부모에게 대하여, 지금은 유일의 믿을 만한 사람이고 유일의 의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났다. 그리고 혜숙에게 대하여서는 무한한 증오의 염이 난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바람을 품고 있었다. 이것―---이환과 자기의 새-―--이것이 이제 화제가 되는 것을 그는 무서워하고 피하려 하면서도 그것이 화제가 되기를 열심으로 바라고 있다. 좀더 상세히 알고 싶었다. 자기 말을 듣고 엘리자베트가 성을 낸 것을 빨리 알아챈 혜숙이는, 화제를 바꾸려고 학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너 기하 숙제 해보았니? 난 암만해두 모르겠두나." ‘아차!’

엘리자베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그의 희망은 끊어졌다.

‘내가 성을 낸 것을 알고 혜숙이는 이렇게 돌려다 대누나.’

하면서도 성을 억지로 감추고 낯에 화기를 나타내고 대답하였다.

"기하? 해보지는 않았어도 해보면 되겠지." "그럼 좀 가르쳐 주렴.“

기하책을 갖다 놓고 셋은 둘러앉아서 기하를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한 이십 분 동안 기하를 푸는 새에 엘리자베트의 머리에는 혜숙과 S의 우교(友交)에 대한 시기도 없어지고, 혜숙에게 대한 증오도 없어지고, 동창생에 대한 애정과 동성에 대한 친밀한 생각만 나게 되었다. 복습을 필한 후에 셋은 잠깐 무언으로 있었다. 그 동안 혜숙은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하면서도 다만 빙긋 웃기만 하고 말은 못 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빨리 하렴.’

엘리자베트는 또 갑자기 희망을 품고 심장을 뛰놀리면서 속으로 명령하였다. 엘리자베트가 듣고 싶어하는 것을 보고 혜숙이는 안심한 듯이 말을 시작한다.

"얘― 얘―“

이 말만 하고 좀 말하기가 별(別)한 듯이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또 시작한다.

"이환 씨느으으은 S의 외사촌 오빠란다.“

이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가운데는 부끄러움도 섞여 있었다. 갑자기 이환이와 직접 대면한 것같이 형용할 수 없는 별한 부끄러움이 엘리자베트의 마음을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좀더 똑똑히 알려고,

"거짓말!“

하고 혜숙이를 쳐다보았다.

"거짓말은 왜 거짓말이야. S한테 물어 보렴. 이 애 S야, 그렇지?“

엘리자베트는 머리를 S 편으로 돌려서 S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환이가 S의 외사촌이라는 것은 팔구분은 믿으면서도……. S는 다만 웃고 있었다.

‘모욕당했다. 집으로 가고 말아야지.’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속으로 고함을 치고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S에게서 이환의 소식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오빠도 너를 사랑한다더라’란 말까지 듣고 싶었다.

"응, 그렇지 얘?“

하는 혜숙의 소리에 S는 그렇단 대답만 하였다. 그리고 의미 있는 듯한 웃음을 머금고 엘리자베트를 들여다보았다.

‘S의 웃음. 의미 있는 듯한 웃음. 무슨 웃음일꼬? 거짓말? 이환 씨가 S의 오빠라는 것이 거짓말이 아닐까? 아니! 그것은 참말이다. 그러면 무슨 웃음일꼬? 이환 씨는 나 같은 것은 알아도 안 보나? 아! 무엇? 아니다. 그도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S에게 고백하였다. 아, 이환 씨는 날 사랑한다. 결혼! 행복!’

그는 자기게 이익한 데로만 생각을 끌어가다가 대담하게 되어서 머리를 들면서, 결심한 구조(口調)로 말을 걸었다.

"얘, S야." "엉?" 경멸하는 듯이 S는 대답하였다. 이 소리에, 엘리자베트의 용기가 대부분은 꺾어졌다. "너…….“

그는 차마 그 뒤는 말을 발하지 못하여 우물우물하다가 예상도 안한 딴말을 묻고 말았다.

"기하 다 했니?" "기하라니? 무슨?“

S는 대답 겸 물어 보았다.

"내일 숙제." "이 애 미쳤나 부다.“

엘리자베트는 왜인지 가슴에서 똑 하는 소리를 들었다. S는 말을 연속하여 한다.

"이제 우리 하지 않았니?" "응?…… 참…… 다 했지…….“

S는 ‘다 알았소이다’ 하는 듯이 교활한 웃음을 머금고 엘리자베트의 그리스 조각을 연상시키는 뺨과 목의 윤곽을 들여다보았다.

‘모욕을 당했다.’

엘리자베트는 또 이렇게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가고 말아야지.’

이 생각을 할 때에 그는 아까 집에서 혜숙의 집에 가야겠다 생각할 때에, 참지 못하게 가고 싶던 그와 동 정도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가고 싶은 고로,

"난 간다.“

소리만 지르고, 동무들이 ‘왜 가니?’ ‘더 놀다 가렴’ 등 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팔과 궁둥이를 저으면서 나섰다.

2

늦은 봄의 저녁빛은 따슷하였다. 도회의 저녁은 더 번잡하였다. 시멘트 인도는 무수히 통행하는 사람의 발로 인하여 처르럭처르럭 때가닥때가닥 하는 소리를 시끄럽도록 내면서도 평안히 누워 있었다. 어떤 때는 사람의 위를 짧게 비추었다, 사람이 다 통과한 후에는 도로 길게 비추었다 하는, 자기와 함께 나아가는 자기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엘리자베트는 본능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아! 잘못하였군. 그 애들은 내가 나선 다음에 웃었겠지. 잘못하였어? 그럼 어찌하여야 하노? S를 얼려야지. 얼려? 응. 얼린 후엔 들어야지. 무엇을. 무엇을? 그것을 말이지. 그것이라니? 아― 그것이라니? 모르겠다. 사탄아 물러가거라. S가 이환 씨의 누이이고. S가 혜숙의 동무이고. 또 내 동무이고. 이환 씨는 동무의 오빠이고. 사람이 다니고. 전차. 아이고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왜 웃는단 말인가? 왜? 우스우니깐 웃지. 무엇이 우스워. 참 무엇이 우스울까?’

그는 또 한번 웃었다. 그렇지만, 이 웃음은 기뻐서 웃는 것도 아니고 즐거워서 웃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스워서 웃는 것이다. 그가 왜 우스운지 그 이유를 해석하려고, 혼돈된 머리로 생각하면서, 발은 본능적으로 차차 집으로 가까이 옮겨 놓았다. 꾸부러진 길을 돌아설 때에, 그는 아직껏 보고 오던 자기 그림자를 잃어버린 고로 잠깐 멈칫 섰다가, 또 한번 해석지 못한 웃음을 웃고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그가 집에 들어설 때는, 다섯시 반 좀 지난 후 K남작은 방금 저녁을 먹고 처와 아이들이 저녁을 먹을 때이다. 조선의 선각자로 자임하는 남작은, 내외의 절(節)과 안방 사랑의 별은 폐하였지만 남존여비의 생각은 아직껏 확실히 지켜 왔다. 엘리자베트는, 먹기 싫은 밥을 두어 술 먹은 후에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아직 어둡지도 않았는데 전등을 켜고 책궤상 머리에 가 앉았다. 아무 작용도 아니 하는 눈을 공연히 멀거니 뜨고, 책상을 오르간으로 삼고 다뉴브 곡을 뜯으면서, 그는 머리를 동작시키고 있었다. 웃음. S. 이환. 결혼. 신혼여행. 노후의 안락. 또는 거기는 조금도 상관없는 다른 공상이 속속이 그의 머리에 왕래하였다. 끝없이 나는 공상을 두 시간 동안이나 한 후에, 이제껏, 희미하니 아물아물 기어가는 것같이 보이던 벽의 흑점이 똑똑히 보이기 시작할 때에, 그는 자리를 펴고 자고 싶은 생각이 났다. 아까 저녁 먹을 때에 남작의,

"오늘 밤에는 회(會)가 있는 고로 밤 두시쯤 돌아오겠다.“

는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별로 안심이 되어 자리를 펴고 전나체가 되어 드러누웠다. 몇 가지 공상이 또 머리에서 왕래하다가 그는 잠이 들었다. 한참 자다가, 열한시쯤, 자기를 흔드는 사람이 있는 고로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전등 아래, 의관을 한 남작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잠이 수천 리 밖에 퇴산(退散)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남작의 자기를 들여다보는 눈으로, 남작의 요구를 깨달았다. 하고 겨우 중얼거렸다.

"부인이 아시면?" ‘아차!’

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부인이 모르면 어찌한단 말인가?…… 모르면?…… 이것이 허락의 의미가 아닐까? 그러면 너는 그것을 싫어하느냐? 물론 싫어하지. 무엇? 싫어해? 내 마음속에, 허락하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냐 아…… 허락하면 어쩠냐? 그래도…….’

일순간에 그의 머리에 이와 같은 생각이 전광과 같이 지나갔다.

"조용히! 아까, 두시에야 돌아오겠다고 하였으니깐 모르겠지요.“

남작은 말했다. 이제야 엘리자베트는 아까 남작이 광고하듯이 지껄이던 소리를 해석하였다. 그러고, 두 번째 거절을 하여 보았다.

"부인이 계시면서두……?" ‘아차!’

그는 또 속으로 고함을 안 칠 수가 없었다.

‘부인이 없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이것은 허락의 의미가 아닐까……?’

남작은 대답 없이 엘리자베트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그리 보세요?“

그는 남작의 시선을 피하면서, 별한 웃음―---애걸하는 웃음―---거러지의 웃음을 웃으면서 돌아누웠다.

‘아차!’

그는 세 번째 고함을 속으로 발하였다.

‘이것은 매춘부의 웃음, 매춘부의 행동이 아닐까……?’

몇 번 거절에 실패를 한 엘리자베트는 마지막에는 자기에게 대하여서도 정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뉘게 대하여선지는 모르면서도 모르는 어떤 자에게 골이 나서, 몸을 꼬면서 좀 날카롭게, 그래도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싫어요 싫어요.“

남작은 역시 대답이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방 안이 어두워지는 것을 알았다. 남작이 불을 끈 것이다. 그 후에는 남작의 의복 벗는 소리만 바삭바삭 났다. 엘리자베트는 정신이 아득하여지고 말았다. 정신이 아득하여진 엘리자베트는, 한참 있다가 거기서 직수면상태로 들어서 푹 잠이 들었다가, 다섯시쯤, 동편 하늘이 좀 자홍색을 띠어 올 때에 무엇에 놀란 것같이 움쭉 하면서 눈을 떴다. 회색 새벽빛을 꿰어서, 먼트고메리회사제 벽지가 눈에 드는 동시에, 그의 머리에는 남작이 생각났다. 곁에 사람의 기척이 없는 고로 남작이 돌아갔을 줄은 확신하면서도, 만일 있었다는 하는 의심이 나는 고로, 그는 가만가만 머리를 그편으로 돌렸다. 거기는 남작이 베느라고 갖다 놓았던 책이 서너 권 두겨 있었다.

‘그럼 저편 쪽에 있지. 저편 쪽 벽에 꼭 붙어 서서, 날 놀래려고 준비하고 있지.’

엘리자베트는 흥미 절반, 진정 절반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갑자기 남작이 숨기 전에 발견하려고 머리를 돌이켰다. 거기는 차차 흰빛으로 변하여 오는 새벽빛에 비친 벽지의 모양만 보였다.

‘어느 틈에 또 다른 편으로 뛰었군!’

하면서 그는 남작을 잡느라고 이편 저편으로 머리를 휙휙 돌리다가,

‘일어나야 순순히 나올 터인가 원.’

하면서 벌떡 일어나 앉아서 의복을 입기 시작하였다. 속곳, 바지로서 버선까지 신는 동안에, 그의 머리에는 남작을 잡으려는 생각은 없어지고 엊저녁 기억이 차차 부활키 시작하였다.

‘내 속이 왜 그리 약하단 말인고? 정신이 아득하여질 이유가 어디 있어?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으면 정신이나…… 아― 지금 남작은 무엇 하고 있노.’

그는 자기가 남작에 대하여서도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을 깨달을 때에, 차라리 놀랐다. 마음속에서는 또 적막의 덩어리가 뭉쳐 나왔다. 그는 무한 울고 싶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다섯시 십삼분이다.

‘울 시간이 넉넉하지.’

이 생각을 할 때에 그는 참지 못하고 꼬꾸라져서 흘쿡 느끼기 시작하였다.

‘남작은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아내가 있는 사람에게…… 내 전정(前程)은 어떠할까…….’

울음이 끝나기까지 한참 운 그는, 눈물이 자연히 멎은 후에 머리를 들었다. 아침 햇빛은 눈이 시도록 방 안을 들이쪼이고 있었다. 밝은 햇빛을 본 연고인지 실컷 운 연고인지, 엘리자베트는, 오랫동안 벼르던 원수를 갚은 것같이 별로 속이 시원한 고로, 일어서서 세수를 하러 갔다. 세수를 한 후에 그는, 거기서 잠깐 주저치 않을 수가 없었다. 밥을 먹으러 가나. 안 가나. 밥은 먹어야겠고. 거기는 남작이 있겠고……. 그러다가 그는, 필사적 용기를 내고 밥을 먹으러 갔다. 거기는 남작은 없었지만 그는 부인과 아이들에게도 할 수 있는 대로 낯을 안 보이게 하고 밥을 먹었다. 그런 후 자기 방에 와서 이부자리를 간지피고 책보를 싸가지고 학교로 향하였다. 정문 밖에 나선 그는, 또 한번 주저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이 길로 가면 이환이를 만나겠고. 저 길로 가면 대단히 멀고. 그의 마음속에는 쟁투가 일어났다. 자기에게 대하여 애정을 나타내지도 않는 이환의 앞을, 복수 겸으로 유유히 지나갈 때의 자기의 상쾌를 그는 상상하여 보았다. 이환이는 그 일을 모르겠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엘리자베트에게는 한 쾌락-―--만약 엘리자베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