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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이후 폐지된 우정총국으로 방치되어있던 청사에 한성한어학교가 들어섰다. 1897년 대한제국 정부가 개교한 한어학교는 중국어를 가르쳐 중국어 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1906년 공포된 외국어학교령에 의하여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로 통합되어 교사를 교동으로 이전하였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175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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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는 애국단체인 [[보안회]]가 우정총국청사에서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일제의 황무지 개간 요구를 막기 위해 펼친 애국운동이었다. “당시 보안회라는 우국단체가 있어 이 건물에서 우국 동지 회원들이 모여 시국 강연을 하며 맹렬히 배일(排日) 붐을 일으킴에 나는 어린 마음에도 곧잘 이 회를 찾아가서 창 너머로 귀를 기울이며 주먹을 불끈쥐던 일이 생각난다.” <ref>‘체신문화’ 1965년 8월호 게재된 농촌사업가 홍병선의 글 중</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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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906년에는 [[오세창]]이 우정총국청사에 야간학교를 개설했으며, 그 학교를 뒤이어 1909년 중동학교가 정규 주간학교로서 운영되었다. <ref>[https://stamp.epost.go.kr/board/board.jsp?id=spsw0101&site=&cate=&site=&key=subject&search=%EC%9A%B0%EC%A0%95%EC%B4%9D%EA%B5%AD&order=&desc=asc&syear=&smonth=&sdate=&eyear=&emonth=&edate=&deptcode=&menuID=spsw0101&pg=1&mode=view&idx=5698]</ref>
  
 
=='''특징'''==
 
=='''특징'''==

2020년 12월 3일 (목) 21:55 판





개요

우정총국은 조선 말, 고종 21년(1884년)에 설치되어 우편(우체) 업무를 맡았던 관청이었다. 책임자 홍영식을 필두로 그 해 음력 10월 1일 우체 업무를 처음 개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 우정총국 청사의 낙성 및 개설 축하연을 통하여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음력 10월 21일 폐지되었다. 폐지된 이후에도 우체 업무는 계속이어졌고, 그 업무가 완전히 마감된 것은 1884년 음력 11월 20일이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우정국로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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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전의감

원래의 우정총국청사는 전의감 건물이었다. 전의감은 조선시대 의료 기관 중 하나로 조선 초기에 설치되었다. 궁중 내에서 사용하는 의약재에 관한 일을 맡던 관청으로, 특히 조신들의 진료를 전담했다. 왕실을 전담으로 맡은 내의원이 새로 설치된 이후에는 궁궐 밖으로 위치를 옮겨 우정총국청사 위치에 자리잡았다. [1] 전의감은 공식적으로 고종 31년인 1894년에 폐지되었다. 실제 우정총국과 조계사 앞 길에 전의감 터 표지석이 있다.

전의감 터 표지석

우정총국

애국운동

갑신정변 이후 폐지된 우정총국으로 방치되어있던 청사에 한성한어학교가 들어섰다. 1897년 대한제국 정부가 개교한 한어학교는 중국어를 가르쳐 중국어 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1906년 공포된 외국어학교령에 의하여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로 통합되어 교사를 교동으로 이전하였다. [1] 1904년에는 애국단체인 보안회가 우정총국청사에서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일제의 황무지 개간 요구를 막기 위해 펼친 애국운동이었다. “당시 보안회라는 우국단체가 있어 이 건물에서 우국 동지 회원들이 모여 시국 강연을 하며 맹렬히 배일(排日) 붐을 일으킴에 나는 어린 마음에도 곧잘 이 회를 찾아가서 창 너머로 귀를 기울이며 주먹을 불끈쥐던 일이 생각난다.” [2] 그 뒤 1906년에는 오세창이 우정총국청사에 야간학교를 개설했으며, 그 학교를 뒤이어 1909년 중동학교가 정규 주간학교로서 운영되었다. [3]

특징

의의와 한계

관련 영상

참고문헌 및 출처

  1. [2]
  2. ‘체신문화’ 1965년 8월호 게재된 농촌사업가 홍병선의 글 중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