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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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윤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4일 (화) 20: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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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箱, 1910년 9월 23일 ~ 1937년 4월 17일)일제 강점기시인, 작가,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로 일제 강점기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 작가이자 아방가르드 문학가이다. 본명이 김해경(金海卿)이며 본관이 강릉 김씨(江陵 金氏)이다. 난해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한 시인 겸 소설가. 건축 일을 하기도 하였다. 《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고 같은해에 《동해(童骸)》, 《봉별기(逢別記)》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시, 소설, 수필에 걸쳐 두루 작품 활동을 한 일제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특히 그의 시와 소설은 1930년대 모더니즘의 특성을 첨예하게 드러내준다.


약력

학력사항

  • 신명학교
  • 동광학교
  • 1922년 ~ 보성고등보통학교
  • 1929년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 건축학



경력사항

  •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
  • 1934년 ~ 구인회 활동
  • 1936년 ~ 구본웅이 경영하는 창문사에서 시와소설 편집

생애 및 활동사항

생애초기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 4통 6호에서 부친 김영창(金演昌)과 모친 박세창(朴世昌)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본관은 강릉이다. 제적부에 기재된 본적은 경성부 통동(이후 통인동으로 개칭) 154번지다. 형제로 누이동생 김옥희와 남동생 김윤경이 있다. 김영창은 일본 강점 전 구한말 당시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 손가락이 절단된 뒤 일을 그만두고 집 근처에 이발관을 개업, 가계를 꾸렸다. 1913년, 백부 김연필은 본처 사이에 소생이 없던 차에 조카인 이상을 데려다 친자식처럼 키우고 학업을 도왔다. 1917년 여덟 살 되던 해 누상동의 신명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화가 구본웅과 동기생이 되어 오랜 친구로 이어졌다. 1921년 신명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경영한 동경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 동광학교가 보통학교와 합병되자 보성고보에 편입했다. 재학 중에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화가 지망생이 되었으며 학업 서적도 상급 수준에 닿았다. 1925년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유화 〈풍경〉이 입선했다. 1926년 3월 보성고보 제4회 졸업생이 되었다. 같은 해 경성 동숭동의 관립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에 입학했다. 1929년 동 학교 건축과를 수석 졸업했다. 졸업기념 사진첩에 본명 대신 이상(李箱)이라는 별명을 썼는데, 구본웅에게 선물로 받은 화구상자(畵具箱子)에서 연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때 받은 화구상자가 오얏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였기 때문에 이상(李箱)은 '오얏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취직과 등단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를 수석으로 졸업하자 학교의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발령을 받았다. 이해 11월 조선총독부 관방회계과 영선계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건축기술자를 축으로 1922년 3월 결성된 조선건축회에 정회원으로 가입, 이 학회의 일본어 학회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일반에게 홍보하기 위해 펴내던 잡지 《조선》 국문판에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9회에 걸쳐 데뷔작이자 유일한 장편소설 《12월 12일》을 필명 이상(李箱) 아래 연재하였다. 1931년 6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 〈자상〉이 입선했다. 같은 해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쓴 시 〈이상한가역반응〉 등 20여편을 세 차례에 걸쳐 발표했다. 1932년 《조선과 건축》에 〈건축무한육면각체〉 제하에 일본어 시 〈AU MAGASIN DE NOUVEAUTES〉, 〈출판법〉 등을 발표했다. 《조선》에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비구(比久) 필명으로 발표하고 단편소설 〈휴업과 사정〉을 보산(甫山) 필명으로 잇달아 발표했다. 동년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공모에서 가작 4석으로 입상했다.



병고

1931년 이상은 폐결핵 감염 사실을 진단받았고 병의 증세는 점차 악화되었다. 1933년 폐결핵으로 직무를 수행키 어렵게 되자 기수직에서 물러앉고 봄에 황해도 배천 온천에서 요양하였다. 이곳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을 서울로 불러올려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개업하며 동거하였다. 같은 해 문학단체 구인회의 핵심 동인인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등과 교유를 트고 정지용의 주선을 통해 잡지 《가톨닉청년》에 〈꽃나무〉, 〈이런 시〉 등을 국문으로 발표했다. 이듬해 이태준의 도움으로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15편을 발표한 후 너무도 원색성 짙은 성적 표현이 끝내 독자들의 항의와 비난에 시달림으로 힘입어 연재를 중도 작파하였다. 같은 해 동 잡지에서 연재된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아호 하융(河戎) 아래 삽화를 그렸다. 1935년 다방 제비를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금홍과 결별한다. 인사동의 카페 쓰루(鶴)와 다방 69를 개업 양도하고 명동에서 다방 무기[參]를 경영하다 문을 닫은 후 성천, 인천 등지를 표표하였다.



도일과 사망

1936년 구본웅의 알선으로 창문사에 근무하면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 창간호를 편집 발간했다. 단편소설 〈지주회시〉, 〈날개〉를 발표하면서 평단의 관심을 받았다. 이해 연작시 〈역단〉을 발표하고 〈위독〉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며 가장 생산적인 한 해를 보냈다. 6월 변동림과 결혼, 경성 황금정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10월 하순 새로운 문학 세계를 좇아 도일했다. 동경에서 삼사문학의 동인 신백수, 이시우, 정현웅, 조풍연 등을 자주 만나 문학을 토론했다. 이듬해 단편소설 〈동해〉, 〈종생기〉를 발표했다. 1937년 2월 사상 혐의로 동경 니시간다 경찰서에서 피검된 후 한 달 정도 조사를 받다 폐결핵 악화로 보석으로 출감한 뒤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4월 17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2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위독하다는 급보를 듣고 일본으로 건너온 부인 변동림이 유해를 화장하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말년의 이상은 술과 여자를 즐겼다고 한다. 동료 문인이자 친구인 박태원은 이상에 대해서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는 않았다."면서 "이상의 이번 죽음은 이름을 병사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었든가 - 그러한 의혹이 농후하여진다."고 하기도 했다.



사후

그를 기려 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 이상문학상을 1977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08년에는 현대불교신문사와 계간 ‘시와 세계’가 이상시문학상을 제정해 매년 수상자를 내고 있다. 2010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생전에 발표한 작품과 사후 발굴된 작품을 포함해 그의 문학적 세계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문학적 활동

작품활동

그의 작품 활동은 1930년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년 일문시(日文詩) 〈이상한 가역반응〉 · 〈파편의 경치〉 · 〈▽의 유희〉 · 〈공복〉 · 〈삼차각설계도(三次角設計圖)〉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3년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 · 〈꽃나무〉 · 〈이런 시(詩)〉 · 〈거울〉 등을, 1934년 《월간매신(月刊每申)》에 〈보통기념〉 · 〈지팽이 역사(轢死)〉를,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烏瞰圖〉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오감도〉는 난해시로서 당시 문학계에 큰 충격을 일으켜 독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연재를 중단하였던 그의 대표시이다. 시뿐만 아니라 〈날개〉(1936), 〈지주회시〉(1936), 〈동해(童骸)〉(1937) 등의 소설도 발표하였다.



문학세계

이상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를 풍미하던 자의식문학시대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문학에 스며있는 감각의 착란(錯亂), 객관적 우연의 모색 등 비상식적인 세계는 그의 시를 난해한 것으로 성격 짓는 요인으로서 그의 개인적인 기질이나 환경, 그리고 자전적인 체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나, 근본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그의 비극적이고 지적인 반응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반응은 당대의 시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한국시의 주지적 변화를 대변함과 동시에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그러한 지적 태도는 의식의 내면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시세계에 도입하여 시상의 영토를 확장하게 하였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억압된 의식과 욕구좌절의 현실에서 새로운 대상(代償) 세계에로의 탈출을 시도하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정신을 논리적 사고과정에서 해방시키고자 함으로써 그의 문학에서는 무력한 자아가 주요한 주제로 나타나게 된다. 시 〈거울〉이나 소설 〈날개〉 등은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시 〈오감도〉는 육체적 정력의 과잉, 말하자면 발산되어야 하면서도 발산되지 못한 채 억압된 리비도(libido)의 발작으로 인한 자의식과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대상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바로 이 같은 역설에서 비롯되는 언어적 유희는 그의 인식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독특한 시각방법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억압받은 성년의 욕구가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원고향인 유년시대로 퇴행함으로써 욕구충족을 위한 자기방어의 메커니즘을 마련하였고, 유희로서의 시작(詩作)은 그러한 욕구충족의 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인간모순을 언어적 유희와 역설로 표현함으로써 시적구제(詩的救濟)를 꾀한 시인이었다.

기타 시 작품으로 〈소영위제(素榮爲題)〉(1934), 〈정식(正式)〉(1935), 〈명경(明鏡)〉(1936) 등과, 소설 〈봉별기(逢別記)〉(1936), 〈종생기(終生記)〉(1937), 수필 〈권태(倦怠)〉(1937), 〈산촌여정(山村餘情)〉(1935) 등이 있다. 유저로 이상의 시 · 산문 · 소설을 총정리한 《이상전집》 3권이 1966년에 간행되었다.



작품에 대한 평가

이상은 작품 내에서 문법을 무시하거나 수학 기호를 포함하는 등 기존의 문학적 체계를 무시한 새롭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였다. 이는 한국어 문학에서 이전에 시도된 적이 거의 없던 것이며, 이로 인해 그의 작품들은 발표 직후부터 현대까지 문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또한 그의 작품은 줄거리의 전개방식이 명확한 경우가 많지 않고 소설의 전개는 극단적으로 주인공의 내면에만 치중되어 있는 자폐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 역시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자신의 흥미나 형이상학적 의미에만 집착하는 성향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작가 이상 스스로에 대한 묘사라고도 분석된다.

문법파괴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특유의 서술방식은 주인공의 비문법적인, 즉 무의식적인 내면을 잘 드러내며, 기존 문학에 대한 반감 또는 무시를 의미하는 동시에, 서술의 대상을 없애고 언어 자체에만 비중을 둔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이상은 언어유희를 이용하여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발간하는 종합전문 월간지에 큰 글씨로 12, 12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하는 방식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을 표현했다.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12, 12를 단순히 숫자로만 이해했고 한글 발음으로 했을 때 욕설이 된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을 이용하여 이상이 그들을 골탕먹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상이 일제에 대한 큰 반감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적은 없었다는 점에서 부정되기도 한다. 한편, 시 오감도의 "13人의 兒孩가…"나 이상이 ‘제비’ 다방 다음으로 개업하려고 간판을 붙였다가 그 의미가 탄로나 허가 취소된 '69 다방', 남녀의 성교를 상징하는 33과 23(二十三, 다리 둘과 다리 셋의 합침) 및 且8(한글로 차팔 또는 조팔이라 읽음. 발기한 남성 성기 또는 18과 대칭을 나타냄) 등의 표현 역시 성적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저서(작품)

날개

단편. 1936년 《조광(朝光)》에 발표. 첫사랑 금홍(錦紅)과의 2년 여에 걸친 동거생활 속에서 얻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와 아내는 각각 다른 의식의 분열된 내면세계를 그대로 표백하고 있다. 분열된 두 의식세계가 결합될 수도, 분열된 채로 나아갈 수도 없는 비극과 고뇌를 담고 있다.

주인공인 나는 일상적 상식의 세계를 떠나 그날그날을 그저 까닭없이 의욕도 없이 방 속에서만 뒹굴며 지낸다. 그는 심심하여 아내가 외출하고 난 후면 아내의 방에 가서 화장품 냄새를 맡고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우며 아내의 체취를 맡는다. 무기력하기만 한 나는 이렇게 함으로써 아내와 만남을 가질 수 있고, 결국은 이것이 육체적인 쾌락을 맛보게 하는 결과를 자아낸다. 이로써 아내는 자기의 직업(돈을 벌기 위한 손님과의 매음행위)에 대한 불편을 느끼게 되고 나를 그 "볕 안드는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아스피린 대신 수면제를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모순에 봉착한 나는 "서서히 아내에 관하여 연구할 작정이다" "아스피린과 아달린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나를 밤이나 낮이나 재워놓고, 그리고 아내는 내가 자는 동안에 무슨 짓을 했나?" 하고 산속의 정적 가운데서 이것저것을 생각해 본다.

이 현실세계의 재비판과 자신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나는 현실에의 "재생(再生)"의 욕망으로 불타게 된다. 이 욕망이란 곧 현실세계에 다시 섞여 걸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날개"는 곧 이 욕망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고 절규함으로써 이 작품은 새로운 탄생의 순간을 말하고 있다.



오감도(烏瞰圖)

연작시(連作詩).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 이 작품이 발표되자 독자들은 '무슨 개수작이냐'며 항의 투서가 수십 장씩 날아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파격적인 작품으로, 종래의 시의 고정관념을 크게 무너뜨린 작품이기도 했다.

〈오감도〉 제1호에 등장하는 〈13인의 아해〉는 최후의 만찬에 합석한 예수의 13제자를 상징한다는 풀이도 있고, 무수(無數)를 표시하여 '13'으로 했다는 설명이 있으나 평자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다른 견해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든 이 작품이 이성(理性)의 몰락에 의하여 파탄을 입은 객체인 현실의 부조리, 그 혼란과 모순을 언어의 도면으로 보여준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을 것 같다.

작품의 구체적 의미파악이 불가능한 반면, 관습이나 합리성을 무시하고 비합리적 용어를 애써 사용했다는 점을 형식상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작품의 전체적 인상에서 풍기는 불안감 · 공포감 · 혼란감 등이 읽는 이에게 막연하게 전달될 뿐이다.

거울

시. 난해를 극한 시작품의 대부분이 반이성(反理性)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데 반하여 작품 〈거울〉은 상당히 이색적이다. 상식과 이성의 세계에서 독특한 화술의 기교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있소//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요//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져보기만이라도했겠소//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작품 〈거울〉의 전편인데 결국은 거울을 통하여 보는 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대부분은 거울에 비친 자기의 실물과는 반대되는 한 측면을 재치있는 화술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된 의미는 제10행의 "잘은 모르지만 외로 된 사업에 골몰할께요"와 최종 행의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모순된 현실에 대한 자기의 무능을 자기도 바라만 보고 어쩔 수 없음을 자의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봉별기(逢別記)

단편. 〈날개〉와 함께 기생 금홍과의 생활에서 얻어진 작품. 그러나 〈날개〉가 '나'와 '아내'의 자의식의 갈등을 그린 것이라면 이 〈봉별기〉는 금홍과 만나고 헤어짐을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금홍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상식성에 지배된 인간이어서 수시로 거짓말을 하고 간음을 하고 출분(出奔)을 한다. 그러나 이 부정하고 불성실한 금홍을 나는 너그럽고 따뜻한 관용의 태도로 맞는 것이다.

"금홍이의 모양은 뜻밖에도 초췌하여 보이는 것이 참 슬펐다. 나는 꾸짖지 않고 맥주와 붕어과자와 장국밥을 사먹여가면서 금홍이를 위로해 주었다." 이렇게 금홍을 측은하게 보는 나는 일단 헤어진 금홍이가 다시 돌아올 때에도 너그럽게 맞아 준다. "금홍이는 역시 초췌하다. 생활 전선에서의 피로의 빛이 그 얼굴에 여실하였다"라면서 아내의 고독과 피로를 이해한다. 혐오할 만한 존재인 금홍, 그러나 나는 그 존재를 차분하고 정답게 대해주는 것이다.

출분한 금홍이가 돌아오자 두 사람은 깊은 밤에 술을 마신다. 금홍은 육자배기를 부르고 나는 영변가(寧邊歌)를 한마디 한다. 구슬프면서 괴로운 대좌다. 삶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숙명 앞에서 떠는 약하디 약한 두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의 따뜻함과 차분함은 그렇다고 간음한 아내를 용서하는 관용은 아니다. 나와 전연 별개로 구분되는 금홍에 대한 동정과 유화(宥和)의 상태, 이해(理解)의 상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