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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5일 (수) 21:12 판

생애

작품

소설

수필

작품 경향

최서해의 문학은 간도시절의 유랑경험과 회령에서 잡역부생활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가난과 지주의 착취에 고통받는 가난한 민중의 삶을 닮아내었다.

그의 문학은 총 세가지 정도의 주제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간도로 유랑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고국>(조선문단, 1924)·<탈출기 脫出記>(조선문단, 1925)·<기아와 살육>(조선문단, 1925)·<돌아가는 날>(1926)·<홍염 紅焰>(조선문단, 1927)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함경도 지방의 시골을 배경으로 무식하고 가난한 노동자나 잡역부들의 생활을 그린 소설로 <박돌의 죽음>(조선문단, 1925)·<큰물 진 뒤>(개벽, 1925)·<그믐밤>(신민, 1926)·<무서운 인상(印象)>(동광, 1926)·<낙백불우 落魄不遇>(문예시대, 1927)·<인정 人情>(신생, 1929) 등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잡지사 주변을 맴도는 문인들의 빈궁상을 그린 소설로 <팔개월 八個月>(동광, 1926)·<전기 轉機>(신생, 1929)·<전아사 錢迓辭>(동광, 1927) 등이 이 계열에 속한다.

연보

연도 내용
1901년 (1세) 함경북도 성진군 임명면에서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
1905년 (5세) 한동안 함북 성진시 한천리 254번지 김순기(외숙부) 집에서 기거함.
1913년 (13세) 나무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 놓고 죽게 얻어맞는 등 힘에 부친 일을 함.
1915년 (15세) 시장 거리에 나가 『청춘』, 『학지광』 등의 잡지를 사다가 읽고, 구소설 ·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읽음. 춘원(이광수)의 글을 읽고 그를 존경하여 동경에 가 있는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음.
1918년 (18세) 간도로 이주하여 유랑 생활 시작. 여기서 한때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함. 간도로 가기전 이혼. 간도에서 재혼했으나 두 번째 처는 곧 사망. 부두노동자, 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로 전전함.
1921년 (21세) 7월 22일 세 번째 처와의 사이에서 첫 딸 백금을 서간도에서 낳음.
1922년 (22세) 간도 생활에서 위병이 생긴 듯함. 이후 죽을 때까지 위병에 시달림.
1923년 (23세) 봄에 간도로부터 귀국. 회령역에서 노동 일을 함. 서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함. 파인(김동환)과 서신 연락을 시작함.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 · 경성 · 성진을 떠돌고, 웅기에 있던 여동생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함.
1924년 (24세) 10월 이광수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 들어가 약 3개월간 기거함. 여기서 『탈출기』도 고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을 공부함.

11월 15일 어머니의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했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개제하여 발표함.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딸(백금)을 버리고 출분.
1925년 (25세) 2월 『조선문단』사 입사. 방인근 집에서 기거함. 『조선문단』을 통해 작품 발표가 많아지자 일약 중견 작가로 발돋움하여 각종 잡지의 문사 프로필에 소개되기 시작함. 4월 14일 백금이 병사함.
1926년 (26세)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

4월 8일 문우 조운의 누이 분려와 『조선문단』사에서 결혼식 거행, 명륜동 2가에서 살림 시작.

6월 『조선문단』이 통권 17호를 내고 휴간되자 『현대평론』 문예란 담당 기자로 당분간 종사.
1927년 (27세) 1월 1일 장남 백(白) 출생. 1월 범 문단 조직으로 발족한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 · 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음. 1월 방인근으로부터 남진우(우당)가 인수한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 『조선문단』이 복간됨과 동시에 그 편집 책임을 맡고 추천 위원이 됨. 『조선문단』 3월호에 계용묵의 『최서방』을 추천함.

5월 5일 『문예시대』사 주최 문예 강연회에서 소설작법론 강연. 서울 기생들의 잡지 『장한』의 편집을 맡기도 함.
1928년 (28세) 8월 26일 개최 예정인 조선프로예술동맹 전국대회에서 조중곤 · 이기영과 함께 재무에 피촉됨. 『중외일보』 기자가 됨.
1929년 (29세) 2월 둘째 딸 출생.

5월『조선일보』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참석. 『신생』의 문예 추천 작가로 위촉됨. KAPF 탈퇴. 가을에 『매일신보』 기자가 됨.
1930년 (30세) 이른 봄 최독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이 됨. 두 살 된 둘째 딸 사망. 차남 택 출생. 국악계의 명창 이동백 · 김소희, 가야금 병창으로 유명한 송만갑 등을 초청하는 등 국악에 관심을 보임. 틈만 나면 장안의 관상가는 물론 심지어 무꾸리에도 남다른 신명과 열을 올리며 찾아다님. 고영환 · 이승만과 함께 체부동의 노국공사가 살던 집을 공동으로 세내어 삶.
1931년 (31세) 5월 창작집 『홍염』을 『삼천리』사에서 간행. 10년 만에 부친이 찾아와 몇 달간 머무르다 다시 간도로 떠남.
1932년 (32세) 5월 4일 『삼천리』사가 주최한 문인 좌담회에 김동인 · 김원주(金元周) · 방인근 · 이광수 · 현진건 · 최상덕 · 김억 · 이익상 · 김원주(金源珠)와 함께 초대됨.

위병이 부쩍 심해져 6월 초순 자리에 눕게 됨. 병명은 위문협착증. 6월 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

7월 6일 수술을 받기 위해 의전병원으로 옮김. 7일 대수술 뒤 과다한 출혈. 수술 중 이익상, 죽마고우 최문국, 동료 박상엽 등 3인이 1200그램의 피를 수혈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함.

7월 9일 오전 4시 20분 처남 조운, 의사 정민택, 누이동생, 이승만 그 외 간호원 2, 3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둠. 당시 가족은 어머니, 부인, 아들 백(白)과 택이 있었음.

7월 11일의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문인장으로 장지는 미아리 공동 묘지. 이광수 · 김동인 · 염상섭 · 김팔봉 · 김억 · 방인근 · 심훈 · 박종화 등과 그 외 많은 문인이 운집하여, 이처럼 많은 문인이 한곳에 모이기는 근래에 없었던 일이라고 전해짐. 자동차도 4,50대나 몰려 장관을 이룸. 관을 운구차에 옮기는 것을 이익상 · 김동환 등 6인이 하고, 관 위에 덮는 영정에는 이병기가 글을 씀. 관을 묻고 그 위 콘크리트한 곳에는 김운정이 ‘서해 최학송지구(曙海 崔鶴松之柩)’ 라고 씀.

7월 23일 오후 4시 서울 백합원에서 이광수 · 김동환 · 박종화 · 주요한 · 양건식 · 이병기 · 방인근 등이 발기하여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 결성.
1933년 7월 8일 오후 8시부터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堅志洞)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소기(小忌) 추도식을 거행.
1934년 6월 12일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아리의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고 추도회 개최. 묘는 1958년 9월 25일 망우리 공동 묘지로 이장됨.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년 기념회 개최. 박웅걸 문화상, 조영출 문예총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 공훈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
2003년 12월 4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 산 57-1번지 망우리 공원 묘지에서 묘지 발견.
2004년 7월 31일 오후 4시 묘지 입구의 도로변에 문학비 세움.

관련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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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해 간도 A는 B에서 유랑생활을 했다 최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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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해 카프(KAPF) A는 B의 소속이다 최서해 소속이다
최서해 탈출기 A는 B를 썼다 최서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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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최서해의 삶과 문학 연구

작성자 및 기여자